캐나다 역사 : ② 유럽인들의 캐나다 대륙 발견 (1000년~)

바이킹족의 첫 접촉

원주민들이 살고 있던 캐나다 땅에 유럽인들이 처음 온 것은 약 1000년 경에 바이킹족이었다. 흔히 우리들의 머리 속에 있는 바이킹들은 매우 잔인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이다. 하지만 이 당시 생존을 위한 투쟁의 장에서는 어느 정도 호전성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바이킹족들은 아주 훌륭한 무역업자였고, 새로운 땅을 찾아 많이 나섰다. 

↑ 바이킹족의 캐나다 대륙 진출 경로 (출처: Royal Ontario Museum)


그렇게해서 아이슬란드를 발견, 정착하기도 하고, 그 옆에 있는 그린란드와 다시 더 서쪽으로 가서 지금의 뉴펀들랜드 지역까지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바이킹족들의 이 역사는 주로 이야기에 의해 구전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실제 유적지와 유물을 통해 바이킹족 이 때 실제로 캐나다 땅에 있었다는 증거들이 나오고 있다.  

↑ Viking족의 Newfoundland 접촉 관련 이미지↑ Viking 유적 발굴 장면


신대륙 탐험 붐과 존캐벗의 뉴펀들랜드 발견

그 뒤로 오랫동안 이땅을 밟은 유럽인들은 없다가 1492년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면서 유럽인들에게 대서양 너머 새로운 땅이 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16~17세기 유럽 각 국가들의 식민지 개척 정책에 따라 다양한 신대륙 탐험이 이루어진다. 

↑ 존캐벗의 탐험 루트↑ 뉴펀들랜드, Bonavita에 있는 존캐벗 동상


실제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5년이 지나, 1497년 영국의 지원 아래 이탈리아 탐험가인 존 캐벗 John Cabot이 뉴펀들랜드 Newfoundland를 발견하였고, 이어 1500년 경에는 포르투갈에서도 이 땅을 탐험하게 된다. 


그리고 1519년에는 스페인의 지원을 받는 페르디난드 마젤란이 남아프리카를 거쳐 인도를 가는 루트가 아닌 대서양을 통해 남아메리카를 지나 인도에 다다를 수 있는 루트를 개척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대륙 발견, 새로운 루트 개척, 그리고 식민지 확보는 유럽의 여러 열강들의 가장 중요한 경쟁이 되었다. 


자크 카르티에의 캐나다 발견

이 신대륙 확보 경쟁에 프랑스는 다소 늦게 참여하게 되는데, 프랑소아 1세의 지원 아래 인도에 갈 수 있는 새로운 루트를 찾으라는 명령을 받고 자크 카르티에 Jacques Cartier 가 대서양을 건너게 된다. 하지만 1534년 자크 카르티에가 처음 도착한 곳은 역시 뉴펀들랜드 지역. 카르티에는 해안선을 따라 내려와서 지금의 Prince Edward Island를 지나 퀘벡주까지 오게 된다. 

↑ 카르티에의 1,2차 탐험루트: 2차탐험 때 몬트리올까지 간다 (출처: 브리태니커)


이곳에서 카르티에는 이곳의 원주민 First Nation인 이로쿠아족 Iroquois을 만난다. 생각보다 상당히 우호적이었던 이로쿠아인들과 모피 거래를 하고 프랑스로 돌아가는데, 이 때 이로쿠아 지도자의 두 아들을 데려간다. 몇 년 후에 카르티에의 캐나다 탐험은 좀더 많은 지원을 받으며 2차 원정길을 가게 되는데, 이제는 이로쿠아의 두 아들이 통역 겸 가이드 역할을 하며, 퀘벡을 지나 몬트리올 지역까지 다다르게 된다. 


이 때 세인트로렌스 강을 지나면서 이들이 강 건너편을 가르키며 카나타 Kanata (이로쿠아족 말로 그냥 마을이라는 뜻이다) 라고 했는데, 카르티에는 자신들이 온 이 대륙의 이름이 Kanata로 착각했다. 어쨌든 1547년부터 이 땅의 이름은 프랑스에 의해 캐나다 Canada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 카르티에와 이로쿠아 사람들의 첫 만남 (출처: Reference.com)


많은 사람들이 뉴펀들랜드 지역을 먼저 발견하게 되었지만 뉴펀틀랜드는 지금도 캐나다에서 상당한 오지이고 가장 마지막으로 준주 Territory로 지정되어서 인지 캐나다 역사에서 최초의 발견자는 카르티에로 인정하고 있다. 


아무래도 실제로 사람이 살 만하고 실제 유럽인들의 정착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 카르티에이기 때문으로 보인다. 또한 카르티에가 처음 이 땅을 발견한 해인 1534년을 캐나다 발견의 첫번째 항해로 기념하고 있다. 

↑ 자크 카르티에의 초상. 퀘벡주에서는 쉽게 이름을 볼 수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카르티에가 프랑스 국왕의 영토임을 표시하는 기둥을 세우는 모습


카르티에는 이 새로운 대륙에서 인도나 잉카나 아즈텍제국처럼 엄청난 금은보석이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여기는 그런 곳이 아니었다. 그냥 원주민들이 사냥과 농사를 하며 살았던 곳.. 프랑스로 돌아갈 때 금과 다이아몬드 비슷하게 생긴 것을 가져갔지만 그냥 황철석과 석영으로 밝혀져 캐나다 땅은 그다지 매력적인 곳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샹플랑의 퀘벡 정착

캐나다를 발견한 이는 자크 카르티에이지만 실제 캐나다를 식민지로서 개척한 이는 사뮈엘 드 샹플랑 Samuel de Champlain이다. 이 당시에 유럽 지역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보내오는 비버 모피가 부자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을 때였다. 금은보석은 없지만 엄청난 비버 모피를 구할 수 있는 곳. 


1600년대가 되면서 다시 본격적으로 이곳 캐나다를 개척하기 위해 여러 시도가 이루어진다. 그리고 사뮈엘 샹플랑은 26명의 선원들과 함께 1608년 7월 3일 현재 퀘벡 시 지역의 땅에 정착하게 된다. 혹독한 겨울을 보내면서 많은 이들이 죽고 간신히 원주민의 도움으로 26명의 선원 중에서 7명만 살아남게 되었고 이들과 함께 모피 무역을 독점하면서 캐나다 땅에 New France의 기틀을 닦게 된다. 

↑ 퀘벡시에 있는 샹블랑의 동상↑ 샹블랑이 만든 첫 거주지 모습 (출처: 위키피디어)


샹플랑은 원주민들에게 총을 공급하고 원주민들은 샹플랑에게 비버 가죽을 공급하면서 두 집단간에는 아주 돈독한 협력 관계가 지속되었다. 또한 이 정착지에 다시 프랑스의 가난한 여성을 이주시키면서 가족, 마을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이 당시 유럽 대륙으로 이 곳으로 옮겨가는 여성들 중에 10명 중 1명만 살아남을 정도로 이주자들의 현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들에 의해 New France는 많은 인구가 늘어나게 되었고, 1663년에 루이14세가 뉴프랑스를 프랑스의 식민지로 공식 선언하게 된다. 

↑ 샹블량과 원주민간 거래 모습 (출처: CW Jeffrey)↑ 샹블랑의 탐험 루트 (출처: Juan Pablo)



이로쿠아인들의 First Nation 통일

1500년대부터 캐나다땅에 유럽인들의 탐험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캐나다땅에 이미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 역시 국가 개념으로 영토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서로 대립과 화해를 반복해 왔었다. 


특히 퀘벡을 비롯한 5대호 주변 지역은 이로쿠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지금의 토론토 주변의 캐나다땅에는 Huron, Petun, Neutral과 같은 부족이, 그리고 지금의 미국 버팔로부터 뉴욕주쪽으로는 5개의 First Nations이 Iroquois라는 이름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 이로쿠아 국가의 온타리오 일대 통일 (출처: 옥스포드대학)


1600년대에 이 연합은 결국 Iroquois라는 하나의 국가로 자리잡고, 유럽의 정착민들에게서 모피 거래를 통해 확보한 총을 통해 Huron이나 주변 국가를 모두 무너뜨리고 이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단일 First Nation 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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