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역사 : ④ 캐나다와 미국의 다툼 (1770년대~)
- 캐나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 2019. 4. 24.
First Nations의 반란
캐나다 땅이 영국의 통치 아래 놓이면서 당연히 프랑스계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다른 사람들, 바로 First Nations 또한 어려움을 겪었다. 영국을 도와 프랑스와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대다수 First Nations은 프랑스 편에서 영국에 대항해서 싸웠다.
영국의 통치 아래 들어가면서 First Nations은 모피 거래도 더 불합리한 가격에 할 수 밖에 없었고, 영국 이민자들이 사기를 치더라도 법률적 보호를 받기 힘들었다. 특히 사냥과 전쟁에 중요한 무기를 구입하는 것이 힘들어졌다.
↑ 폰티악의 First Nation 대표들 규합↑ First Nation을 대표해서 영국과 협의를 한다
이런 불합리한 처우조건은 결국 화를 불러 일으킨다. 오타와 지역의 First Nation 지도자인 폰티악 Pontiac (우리에게는 GM의 자동차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다)이 인근의 First Nation을 규합해서 영국의 주요 요새를 공격하게 되고, 영국은 결국 First Nation에게 그들 거주 지역에 대한 독립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조약을 체결한다.
폰티악은 이 조약 조차 불합리하다고 좀더 많은 투쟁을 촉구했지만 많은 First Nation은 전투에 지칠대로 지쳤고, 또한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에 버티는 것은 어렵다고 여기고 조약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폰티악의 선견지명이었을까.. 이 조약도 점점 더 많은 유럽의 이민자들이 오고 그들에게 더 많은 주거지가 필요함에 따라 거의 무의미해지고 다시 이들에 대한 박해가 진행된다)
아쉽게도 폰티악은 얼마 후에 상점을 나오다가 저격을 당해 죽는다. 영국에게 폰티악의 존재는 정말 위협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퀘벡의 저항, 그리고 1774년 퀘벡 조약
First Nation의 반란, 그리고 퀘벡의 저항 등 영국은 캐나다 땅에서 프랑스를 완전히 물리쳤지만 그들의 마음을 얻지는 못했다. 영국은 이들의 마음을 얻고, 영국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1774년 퀘벡 조약 Quebec Act를 체결하게 된다.
이 조약에는 퀘벡을 좀더 광범위한 지역의 주Province로 확장하고, 이곳의 주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고, 성당을 지을 수 있게 하고, 범죄가 아닌 사업이나 세금이나 재산 분쟁 등에는 프랑스법을 적용하는 등의 권리를 보장한다는 항목이 들어가 있다. 또한 이 조약에는 유럽계 이민자들도 First Nation에게 보장된 땅에서는 상업적 거래나 정착 행위 등을 할 수 없다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 퀘벡조약의 결과: 퀘벡 Province의 영역을 넓히고 세금, 경제활동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한다.↑ 퀘벡조약에 따라 카톨릭에게 자유를 줬다는 것을 희화한 그림.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는 의미를 나타난다
퀘벡 조약이 유발한 미국의 독립 전쟁
언뜻 보면 퀘벡조약은 매우 합리적인 조약인데, 이 조약은 뜻밖에 결과를 가져온다. 세금 등의 문제에 대해서 퀘벡 주에 어느 정도 자치를 주는 이 조약은 기존의 영국 식민지였던 곳에서 자신들은 세금 등에 영국에 얽매여 있을 수 밖에 없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또한 당시 미국도 First Nation 거주지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수익을 거두었는데 그것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1775년 이제 더 이상 영국의 통치를 받을 수 없다라고 생각하게 되고 미국 쪽 영국 식민지인 뉴잉글랜드와 버지니아 주민들이 독립전쟁 (American Revolutionary War)을 일으키게 된다.
↑ 1776년 7월4일 미국 의회에서 공식적으로 미국의 독립을 선언한다
독립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1/3, 이들은 스스로를 패트리어트 Patriots (애국자라고 번역하기에는 좀 애메하다) 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1/3은 여전히 영국을 지지하는 사람들, 이들은 독립파에게는 Tories라고 불리우고, 스스로에게는 Loyalist라고 불리어졌다. 나머지는 그냥 중간층.. 어쨌든 1776년 7월 4일, 이제 영국의 식민지가 아닌 America라는 이름으로 독립선언까지 하게 된다.
↑ 미국 독립전쟁의 첫 전투인 Lexington 전투↑ 미국 독립선언문 (놀랍게도 대마로 만든 종이에 쓰여졌다)
그리고 미국은 퀘벡의 프랑스계 사람들을 전쟁에 끌어들이려 했다. 당연히 영국에 대한 반발이 심해 자신들 편에서 영국과 싸워줄 것으로 여겼지만 퀘벡은 새로운 조약에 만족해서인지 거부했다.
미국은 퀘벡을 공격해 포위해 항복을 받으려 했으나 퀘벡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전에 프랑스도 퀘벡의 요새에 그대로 있고 공성전을 했다면 잘 버텼을텐데 평원에서 싸워 졌을 뿐이지, 요새에서 싸운다면 쉽게 이기기 힘든 곳이 퀘벡이다.
그리고 당시 영국의 대포는 미국의 대포보다 훨씬 성능이 좋아 더 먼 거리까지 쏠 수 있었다. 그리고 날씨.. 혹독한 겨울날씨는 요새를 포위해서 장기간 고립시키기에는 공격하는 입장에서 너무 고역이다. 결국 이 전투에서 미국은 참패를 하고 물러간다. 만약 퀘벡이 미국 손에 들어갔다면 어쩌면 캐나다와 미국은 현재 같은 나라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 독립 쟁취를 전쟁. 이런 무장 독립 투쟁은 많은 나라의 본보기가 된다.↑ 조지워싱턴 장군이 미군을 지휘하고 있다. 이후 초대대통령까지 오른다.
미국의 독립 쟁취와 영국계 미국인의 캐나다 이주
1775년부터 진행된 미국 독립 전쟁은 매우 치열하게 일진일퇴를 하였고, 영국은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었다. 뛰어난 무기에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군인들까지 수적인 열세는 있을지라도 질적인 면에서 훨씬 우월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한다. 바로 미국 독립전쟁에 빈번히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온갖 재정을 동원해 미국편을 도와준다. 그리고 1783년, 거의 10년에 걸친 독립전쟁은 미국의 승리로 끝나게 되고 미국은 이제 독립국가로서 존재하게 된다.
↑ 1783년 파리조약을 통해 드디어 미국의 독립이 공식적으로 인정된다. ↑ 미국은 파리조약을 시작으로 서서히 영토 구매와 강제합병을 진행한다
영국은 미국 땅을 독립국가로서 양보하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캐나다 영토를 탐하지 않는 것으로 독립 조약을 체결한다. 그리고 미국 땅에 있던 많은 영국을 지지했던 Loyalist들은 이제 미국을 떠나 캐나다로 이주해 온다. 약 4만명 정도가 캐나다로 넘어왔고, 이들은 프랑스계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퀘벡 대신에 현재 토론토 인근의 온타리오에 정착하게 되었다.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의 유럽 정복
프랑스의 미국 독립전쟁 개입은 프랑스에게 별다른 이익을 주지 못했다. 전쟁 승리에 대한 전리품으로 영국으로부터 땅을 얻어낸 것도 아니고 거액의 보상을 받아낸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막대한 돈을 퍼부어 미국을 도와줬을 뿐이다.
그리고 이건 프랑스 왕실의 재정 악화를 가져왔고, 과도한 세금을 매길 수 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굶주림에 지쳐 있는 프랑스 시민들은 폭발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는 세계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시민혁명이라고 불리우는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졌다. 최초로 시민들에 의해 왕권을 무너뜨린 혁명전쟁.
↑ 바스티유감옥 공격으로 프랑스혁명이 시작된다 (출처: 위키피디어)↑ 프랑스의 왕권을 무너뜨리고 시민정권이 드러선다 (출처: 위키피디어)
유럽의 여러 국가의 국왕들은 프랑스 왕실이 시민군에 의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보고 자신들의 나라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하고 프랑스의 시민군을 와해시키도록 군대를 보낸다.
하지만 프랑스 시민군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 강력하게 저항하고 외부세력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역이 바로 나폴레옹이다. 나폴레옹은 이후에 스스로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 까지 올라갔고, 유럽은 나폴레옹에 의해 대부분 정복되는 처지가 된다.
↑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너무 멋있게 그려진 그림이다.. (출처: 위키피디어)↑ 색칠 부분이 모두 나폴레옹에 의해 정복된 곳이다 (출처: 위키피디어)
다시 전쟁터에서 맞붙은 영국과 프랑스
프랑스 입장에서 영국은 언젠가 꼭 극복해야할 대상.. 나폴레옹 역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육상 공격에 익숙한 나폴레옹으로서는 영국을 공략하는게 쉽지 않았다. 언제 영국 앞바다인 도버해협에서 육상전투를 해보기도 전에 침몰당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폴레옹은 스페인과 연합해서 강력한 함대를 만들어 영국해군을 격파시키도록 한다.
하지만 지휘관의 능력 차이가 있었던가.. 스페인 트라팔가 앞바다에서 넬슨 제독이 이끄는 영국 전함에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는 박살이 난다. (이 당시 이순신 장군처럼 넬슨 제독은 27척의 전함으로 적 33척의 전함 중 22척을 격파시켰고, 1척도 잃지 않는 뛰어난 전술을 보여 세계 해전 역사에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투다) 그리고 영국은 이 해전을 계기로 나폴레옹을 바다 밖으로는 나오지 못하도록 봉쇄시킨다.
↑ 그동안 해전은 쭉 일렬로 늘어선 다음 함포 대결을 했는데, 영국 넬슨제독은 독특한 함선 배치를 한다.↑ 2줄로 아주 빠르게 적 가운데를 돌파해서 적을 교란시키고 함포를 쏠 수 있는 대형을 무너뜨리는 전략이다
1812년 전쟁 (War of 1812)
역사란 참 재미있는게, 이 때까지 미국은 자신들의 독립전쟁을 도와준 프랑스와 계속해서 무역을 하고 있었고, 물자를 지원했었다. 이를 영국이 그냥 두고볼 수 없었고, 프랑스로 가는 미국의 상선을 나포해 버리게 된다.
미국 입장에서 영국을 그냥 두기에는 분노가 너무 컸다. 그렇다고 유럽 대륙으로 가서 영국과 전쟁을 할 정도로 해군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결국 1812년 미국은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캐나다를 공격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좀 비열한 전쟁이기도 하다. 특별히 전쟁의 목적도 뚜렷하지 않고 전쟁의 대상도 영국 본토가 아닌 자신들과 같은 이주민들이 정착한 캐나다이기에... 그래서인지 1812년 전쟁은 미국에서 그다지 많이 회자되지는 않는다.
↑ 미국은 독립에 이어 1812년 막강한 물량 공세로 캐나다를 침공한다↑ 쉽게 이길 수 있는 전쟁 같았으나 영국이 아닌 캐나다도 만만치 않았다
이 당시에 미국의 인구는 약 8백만명, 그리고 캐나다의 인구는 이제 겨우 50만명 정도였다. 더구나 이 인구 중에서는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꽤 많았고, 영국은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캐나다로 구원병을 보내기가 쉽지 않아 대부분의 캐나다 정착민들은 전쟁의 패배를 예감하고 미국의 승리를 예상했었다. 하지만 쉽게 끝날 듯한 전쟁은 의외로 장기간 끌게 되었다.
캐나다의 First Nations 사람들은 미국 땅에서 인디언들이 어떻게 박해를 받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캐나다 역시 이들에게 완벽하고 평등한 자유를 준 건 아니지만 미국보다는 훨씬 우호적이라는 것을 잘 알고 미국에 대항해 싸우게 되었다. 퀘벡 역시 말할 것도 없이 캐나다를 위해 미국과 싸웠다.
Isaac Brock 장군의 활약
또한 Isaac Brock 이라는 걸출한 장군이 디트로이트 부근에서 First Nation과 함께 대승을 거둠으로써 이 전쟁에서 캐나다에 승리의 희망을 가져다 준다. (내가 살고 있는 St Catharines에는 Brock장군을 추모하며 이름이 붙여진 Brock University가 있다)
↑ 브록 장군이 First Nation 지도자와 협력해 전략을 짠다↑ 브록의 옆모습을 로고화한 브록대학교
Laura Secord의 헌신
그리고 Laura Secord라는 세 아이를 둔 여인은 미군이 나이아가라를 건너 대대적으로 캐나다를 공격할 것이라는 전략을 엿들은 뒤에 새벽에 몰래 30km나 되는 거리를 뛰어가 캐나다 장군에게 알려줘 미국의 대군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해줬다. (역시 St Catharines에 Laura Secord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가 존재한다. 이 지역에서 Top3 안에 들어가는 매우 우수한 학교다)
↑ 로라세코드 여사는 평범하지만 위대한 시민의 모범사례로 많이 나온다.↑ 로라세코드 여사를 기념하는 고등학교.. 가끔 가는데 정말 좋은 학교다
Lundy's Lane 전투
1812년 전쟁 중 가장 치열하고 희생자가 많이 나왔던 전투는 1814년 Lundy's Lane 전투다. Lundy's Lane은 미국에서 나이아가라 지역을 지나 토론토로 가는 길목으로서 (현재 나이아가라폴스와 웰랜드를 연결하는 20번 도로에 해당한다) 상당히 중요한 루트라고 할 수 있었고 캐나다로서는 이 지역 방어에 매우 신경을 썼다.
미국, 캐나다 양측에서 각각 900여명씩의 사상자가 나왔으며 사망자들도 약 200여명에 다다를 정도 였다. 미국의 경우는 정규 군대지만 캐나다는 일반인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이들의 많은 희생으로 다행히 캐나다는 승리하고 방어에 성공할 수 있었다.
↑ Lundy's Lane 위치↑ Lundy's Lane 전투 스케치
이외에도 몬트리올, 요크(현재 토론토) 부근에서도 전투가 크게 있었고 그때마다 미국은 앞도적인 공세에도 쉽게 이길 수 없었다.
1812년 전쟁에는 First Nation 원주민들도 전쟁에 많이 개입했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First Nation 원주민은 미국이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어떤 핍박을 줬는지 잘 알고 있었다. 게릴라전에 뛰어나고 사격술도 좋은 First Nation 사람들은 미국에게 큰 위협이었다.
이 때 영국은 아메리카 인디언에게도 무기를 공급해줘서 미국의 후방을 위협하도록 했다. 전후방을 교란시키는 아주 좋은 전략이었으리라 싶다..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미국은 인디언의 치열한 투쟁을 경험해야 했다)
전쟁의 결과
↑ 벨기에 Ghent에서 전쟁을 끝내는 평화 협정을 체결한다 (출처: 위키피디어)↑ 오타와에 있는 1812년 전쟁에서 활약한 캐나다인을 기념하는 동상
4년간의 계속된 전투는 1814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결국 평화 협정을 맺으면 끝나게 된다. 이 때 유럽에서도 영국의 연합군이 나폴리옹 군대를 패배시키면서 이제 미국은 영국 본국까지 고려해야될 상황이었기에 더 이상 캐나다와 전투를 하기에는 부담이 컸다.
영국도 오랜 전쟁에서 지친 상태에서 다시 미국과 전쟁을 하기에도 부담이 컸기 때문에 협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이후 추가 협정을 통해 북위 49도 선을 경계로 캐나다와 미국간 국경선을 명확히 하고, 서로 침범하지 않기로 합의하게 된다.
↑ 나이아가라지역에는 나란히 캐나다 요새와 미국 요새가 마주보고 있다↑ 종전협정의 결과로 수립된 국경선. 아직 오레건주는 주인없는땅이다
간혹 1812년 전쟁의 승리자는 누구인가에 대해서 논쟁이 나온다.
미국의 승리였지만 미국이 애초에 예상했던 것과는 훨씬 다른 고달픈 승리였다. 하지만 이제 미국도 이 전쟁에서 승리 덕분에 국제사회에서 막강한 영국과 대등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제 더 이상 영국을 두려운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번째 독립 Second Independence라 부르기도 한다.
캐나다 또한 미국의 공세를 잘 막아내었고, 이 전쟁으로 갈라져 있던 국론을 하나로 일치시키고, 캐나다에 대한 애국심과 자부심을 한층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미국처럼 독립과 연방국가로 통일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된다.
↑ 나이아가라의 캐나다쪽 요새 모습↑ 캐나다쪽에서 바라보는 미국쪽 나이아가라 요새 모습
'캐나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캐나다 역사 : ⑥ 각 식민지의 인구증가와 발전 (1840년대~) (0) | 2019.04.25 |
---|---|
캐나다 역사 : ⑤ 각 식민지에서의 자치, 반란 그리고 책임정부제 도입 (1820년대~) (0) | 2019.04.24 |
캐나다 역사 : ③ 식민지를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1600년대~) (0) | 2019.04.23 |
캐나다 역사 : ② 유럽인들의 캐나다 대륙 발견 (1000년~) (0) | 2019.04.22 |
캐나다 역사 : ① 원주민의 땅 (1만년전~) (0) | 2019.04.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