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역사 : ⑤ 각 식민지에서의 자치, 반란 그리고 책임정부제 도입 (1820년대~)

식민지의 자치 얘기를 꺼내기 위해서 다시 1812년 전쟁 이전으로 돌아가보자. 


1791년 Constitutional Act

1774년 퀘벡 조약 체결과 그로 인한 미국의 독립전쟁을 치른 후 1791년 Constitutional Act에 의해 퀘벡주는 다시 분리되었다. 영국계 이주민들이 많이 사는 Upper Canada, 그리고 프랑스계 이주민들이 많이 Lower Canada로.. 그리고 이 때부터 영국은 자신들의 캐나다 내 식민지들, 즉 British North America의 각 식민지에 부총독Lieutenant Governor을 입명하고, 이들에 의해 자치 정부, 의회를 꾸리도록 한다. 

↑ 1791년 다시 Upper Canada와 Lower Canada로 분리된다. 합쳐졌다가 분리도었다가 계속 반복이다.↑ 캐나다 시민권 획득 시험에 나오는 문제다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이런 것도 알아야 하나보다...)


이 당시 영국의 캐나다 내 식민지를 살펴보면 

British Colony에는 Upper Canada(온타리오), Lower Canada(퀘벡), New Brunswick, Nova Scotia, Prince Edward Island, Newfoundland 등이 들어가고,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Rupert's Land는 British Territory에 해당된다. 영국에서 British North America에 대한 총독 Governor를 입명하면, 이 Governor는 각 식민지를 책임질 부총독Lieutenant Governor를 입명하게 된다. 



Upper Canada의 발전

■ 초대 부총독, Simecoe

이렇게 부총독이 입명되면 부총독이 실제 식민지 정부를 운영할 정부 관료들을 선정하고 그들에 의해 모든 정책이 입안되고, 집행되고, 판결까지 진행이 된다. 


지금의 온타리오에 해당하는 Upper Canada의 경우 1791년 John Grave Simcoe라는 영국 해군 장군이 초대 부총독으로 임명되어 온다. Simcoe 부총독은 재임시절 미국 독립이 신경쓰였는지 미국의 민주제보다 영국의 군주제와 의회제도가 더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 Simcoe 초대 Upper Canada 부총독의 초상. 좋은 지도자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인물이다↑ 캐나다도 오랫동안 노예제가 있었다. Simcoe가 없었다면 더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것이다.


영국의 각종 선진 제도를 가져와 캐나다에 적용하고, 의회 제도를 적용시켜 의회 정치를 실현시키기도 했다. 또한 군인 출신답게 미국과의 접경지대에 있는 수도를 York(현재의 토론토)로 옮겨 개발한다. 


또한 군사적 방어와 교통편의성을 위해 Yonge Street과 Dundas Street 두개의 남북/동서를 연결하는 도로를 건설한다. 그리고 그의 업적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노예제 폐지다. 그는 대영제국 내 최초로 노예제를 폐기해서 캐나다 땅에 더 이상 노예가 없도록 하였다. 

↑ Simcoe 부총독에 의해 Yonge Street이 만들어진다↑ 오늘날 토론토에서 가장 번화한 Yonge Street의 모습


약 6년의 재임 기간 중에 정말 많은 일을 해냈는데, 이런 이유로 온타리오쪽에는 그의 이름을 기념한 도시, 거리, 호수 등도 꽤 많다. (내가 공부하고 있는 Niagara College에도 캠퍼스 내 Simcoe 동이 있을 정도다)


■ Upper Canada의 발전과 Welland운하

Upper Canada 지역이 다른 식민지보다 발전할 수 있었던 것에는 Simcoe와 같은 우수한 지도자가 있었을 뿐만아니라 상업적으로도 새로운 시도가 있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Welland운하다. Welland 운하를 처음 건설한 사람은 William Hamilton Merritt으로 1824년부터 착공해서 1829년에 온타리오호수와 웰랜드강을 연결하고, 1833년에는 이리호까지 연결하는 운하를 완성하게 된다. 

↑ Welland 운하는 5대 호수를 연결하는 중심 요충지다↑ 운하의 위치


이렇게 운하로 Great Lake들을 연결함으로써 캐나다에서 생산된 여러 물품들이 미국의 여러 지역으로 수출될 수 있도록 했다. 아마 현재의 토론토가 이렇게 번성할 수 있었던 비결도 이 웰랜드 운하 덕분일지도 모른다. 

↑ Merritt과 Welland 운하를 기념하기 위한 우표↑ 현재 운하 모습


웰랜드는 운하는 몇 차례 붕괴와 근로자들의 폐업 등으로 경영 위기를 겪기도 했고, 결국 1839년에는 Upper Canada 정부에서 이 운하를 인수하게 된다. 이후 3번의 추가 운하 건설이 진행되었고, 육상교통의 불편을 줄이기 위해 현재의 위치 대로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도 1년에 약 3천여 배들이 운행을 하고 있으며 이 운하를 통해 대서양과 5대호 주변의 각 도시들까지 연결되고 있다. 


이리호와 온타리오호는 약 170m 정도의 단차가 있어, 현재 8개의 물막이 락Lock으로 물을 채우고 배를 들어올려 이동시키고 있다. 


↑ 이리호수와 온타리오호수의 단차,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Lock




식민지 자치제도의 폐단

1812년 전쟁의 종료와 함께 어느 정도 미국과의 국경선 분쟁이나 무역 협정 등이 어느 정도 일단락나면서 이제 British American Colony의 각 식민지들도 많은 발전을 하게 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오게 되고 점점 더 많은 이권 분쟁이 생겨나고 권력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간의 갈등이 점점 더 깊어졌다. 


특히 1791년 Constitutional Act에 따라 부총리와 그가 임명한 수상과 Council에 의한 통치는 견제할 수 없는 독제라는 예상치 못한 문제를 가져온다. 


이 당시 가장 영향력이 쎈 식민지는 당연히 영국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Upper Canada. 여기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했던 사람이 바로 John Strachan이라는 성공회 주교다. 이 사람을 비롯해 약 30명의 사람들이 모든 실권을 잡고 의회, 법원, 교회 등의 모든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들이 거의 가족처럼 학연, 지연, 교연 등으로 깊은 관련성이 있다고 해서 이름도 Family Compact라 불렀다. 


■ Upper Canada에서 반란

언제나 그렇지만 권력의 독점은 문제를 일으킨다. 이 지역에는 영국계 이민지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건너온 사람들도 많았다. 그들이 보기에 Family Compact에 의한 정부는 마치 신분제도가 있는 것처럼 영국계 사람들은 First Class, 미국계 사람들은 Second Class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특히나 영국 성공회 Anglican 교회는 각종 이권을 가져오고, 미국계 사람들이 많이 믿는 감리교 Methodist, 침례교 Baptist, 장로교 Presbysterian 등은 푸대접을 받았다. (역시 종교적 차별과 대립이 분쟁의 주요한 원인이 된다) 

↑ Family Compact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반란. 다 같이 잘 살면 좋겠지만...예나 지금이나 참 어렵다.↑ 예상 외 강한 투쟁. 결국 총독으로부터 군인이 파병되면서 진압되었다


이들은 개혁당 Reform Party까지 만들며 의회 다수를 차지하기도 했지만 이 당시 의회는 그저 자문 역할만 할 수 있을 뿐 어떤 의결 권한도 없었다. 정치적으로 극복할 수 없었던 한계는 결국 1836년 급진적인 Reformer들에 의해 무력 반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 당시 각 식민지에는 Militia라는 정식 군대라기보다는 자치 경찰에 가까운 치안을 담당하는 조직이 있었는데, 시민들에 의한 반란군과 Militia가 서로가 총을 겨누게 되었고, 결국 이듬해 캐나다 총독으로부터 무장 군인들이 파병되면서 반란은 진입된다. 


성공하지 못한 반란의 결과는 언제나 그렇듯이 비참하다. 900명 가까운 사람들이 감옥에 갔고, 20명이 사형을 당했고, 수많은 개혁당 사람들이 미국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 이 반란들은 나중에 여러나라에 영향을 끼친다↑ 1838년 반란을 배경으로 쓰여진 유명한 소설까지 있다..


■ Lower Canada에서 반란

1791년부터 Upper Canada와 Lower Canada (지금의 퀘벡 주)로 나눠, 프랑스계 이민자들이 Lower Canada에서 좀더 독립된 자치권을 가지고 살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Lower Canada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이 프랑스계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은 영국계였고, 경제력 좌우하는 상업을 담당하는 이들 역시 영국계였다. 


프랑스계 사람들의 대부분은 주로 농부들.. 더구나 1812년 미국과의 전쟁 이후에 영국 본토에서 많은 사람들이 Lower Canada로 몰려 왔고, 그들에게 영국계 집권자들은 좋은 땅을 나눠졌다. 의회에 프랑스계가 다수 선출되었더라도 총독과 부총독에 의한 친영국계 정책은 프랑스계를 위한 평등 정책을 번번히 좌절시켰다. 


또한 1832년에는 이들에 의해 콜레라가 옮겨져 와 약 7,000여명의 프랑스계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 당연히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상황. 더구나 1836년 Upper Canada의 반란을 목격했기에, 퀘벡 사람들도 드디어 그들의 분노를 반란으로 표출한다.  


그냥 단순한 소수 사람들의 시위가 아니었다. 1837년에는 퀘벡의 독립을 요구하며 무력 반란이 일어났다가 영국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1838년에는 두번째 반란까지 일어났었다. 


↑ 시민들에 의해 선출된 의원들은 그저 자문역할만 할 수 있었다. 결국 자문의 한계를 깨닫고 혁명의 깃발이 휘날린다



반란의 수습

■ Upper Canada와 Lower Canada의 통합 관리

반란은 처절하게 진압되었고, Upper Canada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가고, 사형을 당하거나 미국으로 도망가야만 했다. 그리고 영국은 Upper Canada와 Lower Canada 분리가 오히려 더 프랑스의 영국문화로의 동화를 막는다고 생각하고 다시 하나의 Canada로 통합시켜 관리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다수 인구를 차지하고 있는 영국계가 의회를 자연스럽게 차지하게 되고 프랑스 사용을 금지시킴으로써 자연스럽게 영국문화에 흡수되길 바랬다. 


■ Atlantic Colonies의 상태

Upper Canada와 Lower Canada는 사회구조 상 갈등이 많을 수 밖에 없었다면, 상대적으로 Atlanic Colonies의 각 식민지들(New Brunswick, Nova Scotia, Prince Edward Island, Newfoundland)은 그다지 큰 갈등이 없었다. 옛 아카디아지역이었던 이곳은 영국에 의해 프랑스가 통치를 포기하면서 프랑스계 사람들도 모두 이곳을 떠나야만 했다. 


따라서 거의 대부분 영국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고 종교적으로도 대부분 프로테스탄트여서 신구교간 갈등도 별로 없었다. 또한 미국에서 넘어온 사람들은 대부분 Upper Canada나 Lower Canada에 살았기 때문에 영국/미국계 이주민간 갈등도 없었다. 이곳들 역시 Family Compact에 의해 관리되었지만 대체로 별 불만없이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이곳 사람들 대부분은 농업이나 어업, 벌목 등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권력층이나 부자들이 대부분 땅 소유자들이다보니 소작농인 대부분의 시민들의 의견이 국정에 반영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서서히 시민들 중에서도 자립해서 성공한 사람들이 생기고 점점 산업이 발전하면서 제도의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나오게 된다.


■ Durham's Report와 책임정부제 Responsible Government 도입

Upper Canada와 Lower Canada 두 지역에서의 반란이 부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는데, 영국 본토에서 더램 경 Lord Durham을 캐나다로 보내 식민지에 대한 실태조사를 벌이게 된다. 


그리고 1839년 Durham에 의한 보고서에 의해 실상이 보고 되고, 영국 정부는 캐나다 식민지 내에 시민들에 의해 지지 받는 당에 의해 국정이 운영되는 책임정부Responsible Government 제도를 도입하도록 한다. 

↑ 영국 Durham 백작의 초상화. ↑ 캐나다 현재 의회제도의 근간이 바로 이것이다


Atlantic Colonies 쪽도 서서히 산업발달이 되고 빈부 차이에 대한 시민들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이 지역 식민지에도 마찬가지로 책임정부 제도가 도입된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부총독까지는 영국 정부에 의해 임명되지만, 실제 정부를 운영할 사람들은 부총독이 고르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된 사람들 맡게 되었다. 선출된 의원들의 수장은 Prime Minister 총리라는 타이틀을 갖고 의정을 잘하면 계속 유지되고 잘 못하면 시민들에 의해 다른사람들로 다시 선출되도록 했다. 오늘날 의원내각제 선거제도와 거의 동일한 제도가 시작된 것이다. 


이제 책임정부제의 영향으로 각 식민지에서는 시민들의 지지를 받는 지도자, 의원이 당선이 되고, 이들에 의해 정책 집행이 이루어지게 된다. 하지만,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렇게 선출된 사람들은 지지층의 의견 영향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었다. Upper/Lower 통합 Canada의 경우, Lower쪽도 지지자들의 의견도 충족시켜야 하기에 영어 이외에 다시 프랑스어가 허용되고, 카톨릭교회도 다시 이 지역에서 비중있는 역할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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