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역사 : ⑥ 각 식민지의 인구증가와 발전 (1840년대~)

Atlantic Colonies

1848년 캐나다 각 식민지에 책임정부가 들어서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각 식민지별 급속한 산업발달이 이루어진다. 동부 해안쪽의 4개의 식민지들 (흔히 Maritime Colonies 또는 Atlantic Colonies라고 부른다) 역시 각 자연환경에 맞게 발전이 진행된다. 


비슷한 곳에 있기에 비슷한 산업이 발달할 것 같지만, Newfoundland는 주로 어업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Nova Scotia는 해운과 탄광이, Prince Edward Island는 비옥한 토지로 농업이 잘 발달되어있어다. 또한 New Brunswick은 광활한 땅덩어리에서 수백년간 자라난 소나무 군락을 활용한 벌목과 선박건조 산업이 잘 발달되어 있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캐나다에서 제작된 선박, 각종 제품들, 광물, 농산물과 생선 등을 많이 수입해 가면서 산업이 급격이 팽창해 갔다. 또한 미국에서도 철도 건설 붐이 일어나는데, 캐나다는 미국과 무관세 협정을 맺은 덕분에 많은 자재들이 미국으로 수출되었다. 

↑ 미국의 인프라구축 붐은 캐나다 경제에 활력이 된다.↑ 1870년대까지 깔린 미국의 철도 라인


Province of Canada

1) 하나의 단일 주이지만 Canada West and East로 구분

Upper Canada와 Lower Canada는 1841년 통합되면서 하나의 Province of Canada가 되지만 여전히 구획적으로 구분해서 Upper Canada는 Canada West, Lower Canada는 Canada East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이름도 캐나다연방국가이 설립되는 1867년부터는 현재처럼 온타리오와 퀘벡으로 다시 수정된다)


캐나다 역사를 알아가면서 헤깔렸던 것이 Canada West. 딱 이름만 보고 드는 느낌은 지금의 밴쿠버쪽일 것으로 생각이 들겠지만 현재의 온타리오주 남쪽을 말한다. 1840년까지만 해도 캐나다라는 이름은 현재 캐나다의 동부쪽만 해당이 되었고, 현재 캐나다의 서부쪽은 그냥 British Territory로서 아직 First Nations들이 주로 살던 곳이었다. 

↑ Canada East와 West의 구분. Upper/Lower와 크게 차이는 없다↑ Canada West와 East를 잇는 철도가 설립된다. (검정색 굵은선)


Canada East와 West에 생긴 주요 변화는 Canada West와 East를 잊는 철도가 놓이면서 산업 전체가 크게 융성해 졌고, 이제 사람들은 호수와 강가와 같이 배로 물자를 옮길 수 있는 곳 근처에 사는 것이 아니라 좀더 내륙쪽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2) 아일랜드인의 집단 이주

또한 이 지역의 인구변화도 눈에 띄는데, 통합된 캐나다에 큰 변화는 아일랜드인들이 대거 들어왔다는 것이다. 1850년경 아일랜드에는 감자 농사가 흉작이 되면서 당시 아일랜드 인구 800만명 중에서 약 200만명 가까이 사망하는 일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많은 아일랜드인들이 조국을 떠나 미국과 캐나다로 건너오게 되었다. 약 200만명이 조국을 떠나 새로운 국가에서 정착을 하게 되는데, 캐나다의 경우, 프랑스계 사람들이 많은 East쪽보다 영국계 사람들이 많은 West에 정착을 하게 된다.

↑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인한 고통을 묘사한 그림 (출처: ihistory.com)↑ 캐나다, 미국, 뉴질랜드 등으로 떠나는 아일랜드인 (출처: iHistory.com)


1840년대부터 꾸준히 늘어난 아일랜드계 인력 때문에 캐나다 West의 주요 도시들은 거의 대부분 아일랜드계가 제1 인구 비율을 가질 정도였고, 그 영향으로 시장이나 주요 관공서 수장들도 대부분 아일랜드 출신이 선출된다. 


아일랜드의 급속한 유입으로 아일랜드 문화도 풍성해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인 3월 17일 세인트패트릭데이St Patrick Day다.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인 패트릭의 사망일 기념하는 날로서 이날에는 모든 사람들이 푸른색 옷을 입고 축제를 즐긴다. 이런 전통적배경으로 아일랜드를 특징짓는 색상으로 초록색을 많이 든다. 영국의 붉은색과 비교해서 아주 선명히 구분되는 색이다. 

↑ 푸른색 가운을 두르고 있는 세인트 패트릭의 모습.↑ 세인트패트릭데이는 전세계 기독교인들의 축제일로 되었다


갑자기 아일랜드 출신이 많아져서 인지 아일랜드 출신끼리도 갈등을 겪게 되는데, 특히 아일랜드의 신교들은 Organge Order라는 조직을 스스로 만들고 여기에 기존 영국계 신교도들이 참여하면서 거대 조직화되고 이 조직을 바탕으로 주요 관공서 조직까지도 장악하게 된다. 


당연히 아일랜드계 구교(카톨릭)도들을 공개적으로 탄압하는 일이 벌어진다. (온타리오쪽에 유럽과 달리 오래된 카톨릭 성당 하나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 아일랜드 신교 Orange Order의 시가지 퍼레이드. 자신들을 과시하기 위한 행사다..↑ 이들은 카톨릭과의 차별화를 위해 초록색이 아닌 오렌지색을 사용한다


3) 영국 고아들의 이주

아일랜드 뿐만아니라 기근은 영국 전역에서도 비슷했다. Home Children이라고 부르는 많은 아이들이 발생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실제 고아이기도 하고, 기근으로 더 이상 부모들이 아이를 돌볼 수 없어 캐나다로 이주해 온 아이들을 말한다. 


이렇게 이주해온 아이들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거나 도시 공장에 소년공으로 일하게 된다. 1930년대까지 약 10만명 정도의 아이들이 영국에서 캐나다로 건너왔는데, 오늘날 캐나다인 10명 중 1명은 이 Home Children과 연관이 있다고 한다. 

↑ Home Children의 캐나다 이주 (출처: fastforward.ca)↑ 일하고 있는 Home Children (출처: bac-lac.gc.ca)


4) 미국 흑인 노예들의 탈출

아일랜드인만 들어온게 아니라 미국으로부터 흑인들 역시 많이 넘어오게 된다. 캐나다는 1933년 공식적으로 캐나다 전역에 노예제를 금지하면서 (온타리오는 Simcoe 부총독 덕분에 그 전부터 자유였다) 자유를 찾아 미국을 탈출해 캐나다로 넘어왔는데, 이 탈출을 조직적으로 도와주는 Underground Railroad (지하철 이름 같지만 철도와는 아무 상관 없고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단체 이름이다)라는 단체까지 있어 많은 흑인들이 캐나다 땅에서 자유를 찾을 수 있었다. 


현재 내가 거주하고 있는 세인트 캐서린즈 시는 과거 이들 Underground Railroad 단체가 있던 곳으로 흑인노예들이 일단 이곳까지 온다면 안전하게 탈출했다고 여길 정도였다고 한다. 

↑ 미국 흑인 노예들의 탈출↑ 캐나다의 Underground Railroad 조직의 도움으로 탈출 시도


재미있는 것은 1850년 미국은 도망친 노예를 다시 잡아올 수 있도록 하는 Fugitive Slave Acts 법을 통과시켜 노예사냥꾼들이 대거 캐나다에서 활용하는 일도 벌어진다. 뿐만아니라 Underground Railroad 단체의 수뇌부에 대한 현상금도 내거는 등 노예 탈출과 관련해서 캐나다와 갈등을 빚게 된다. 

↑ 탈출한 노예를 찾는다는 현상금 포스터↑ 현상금 사냥꾼에 의해 다시 잡혀가는 흑인


어쨌든 아일랜드계와 흑인들 등의 이주로 캐나다 West의 인구는 50만명에서 150만명으로 3배 정도 늘어났고, 토론토는 이 지역의 중심도시로서 급격한 성장을 하게된다. 


5) Province of Canada의 수도, Bytown (오타와)

이제 Province of Canada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됨에 따라 이 지역의 행정을 위한 수도에 대해서 언급이 된다. 편의상 West와 East로 구역이 나눠져 있기는 하지만 엄연히 Province of Canada라는 하나의 통합된 주다. 그리고 공평한 행정을 위해 이전까지 West(온타리오)의 York(온타리오), 킹스톤, East의 몬트리올, 퀘벡시티 등을 옮겨다니며 수도로 삼았기 때문에 불편함도 많았다. 

↑ 오타와에 설치되어 있는 리도 운하↑ 미국국경을 피해서 만든 운하..


이러한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수도를 한 곳으로 정하게 되는데 당연히 기존 4개 도시가 치열하게 경쟁을 했다. 하지만 1857년 12월 31일,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은 이들 4개 도시가 아닌 전혀 새로운 도시, 별로 크지도 않고 유명하지도 않은 작은 도시, 하지만 East와 West의 경계에 있는 Bytown을 수도로 삼게 된다. 


Bytwon은 영국 공병대장인 John By에 의해 온타리오호와 오타와강을 연결하는 리도운하가 건설되면서 생긴 작은 도시로서 그의 이름을 따 Bytow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정식으로 시로 승격된 것도 겨우 1854년. 이 때 이름이 오타와(First Nation 언어로 교역하다라는 의미다)로 변경된다. 

↑ 수도 지정 뒤 국회의사당 건축 모습↑ 현재 오타와 국회의사당 모습.


오타와는 Canada East와 West의 접경지대에 있으면서 영어와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도 비슷하게 섞여 있어 양쪽 진영간 갈등을 해소하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그리고 오타와는 빅토리아 여왕에 의해 수도로 지정되면서 국회의사당과 각종 행정을 위한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발전하게 되고, 1867년 캐나다 연방이 수립되었을 때도 연방국가의 수도로서 역할을 지속하게 된다.


Rupert's Land

허드슨베이 회사가 차지하고 있던 땅인 Rupert's Land 역시 1850년대부터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게 된다. 이 지역의 경우 메이티 Metis (First nation 사람들과 영국/프랑스계 이민자들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후손들)들이 First Nations 사람들과 함께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고, 또한 Canada East와 West에서의 인구 증가로 비옥한 땅들이 부족해지자 농사를 위해 새로운 땅을 찾아 이주해온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이들은 레드 강Red River라는 지금의 Manitoba의 주도인 위니펙 Winnipeg 부근의 물과 비옥한 땅이 풍부한 곳에 정착하게 된다. 

↑ 1862년 캐나다 모습. Canada주는 Ottawa로 수도가 정해지고, British Columbia가 새롭게 영국의 식민지로 생겨난다. (출처: Map Archive)


British Columbia Territory (Pacifiic Coast의 식민지)

지금의 캐나다 서부 태평양 해안가쪽은 캐나다에서 상대적으로 늦게 개발이 된 곳이다. 이곳이 처음 알려진 것은 18세기 후반 영국의 제임스 쿡 James cook 선장에 의한 탐험 덕분이었다. 쿡 선장의 부하였던 밴쿠버가 이곳의 지도를 작성하게 되었고, 나중에 그의 이름을 따서 Vancouver Island와 Vancouver City라는 이름까지 짓게 되었다. 

↑ 쿡 선장의 세번째 항해(파란색 루트)에서 캐나다 서부지역을 지나간다↑ 금이 발견되자 잽싸게 미국과의 애매한 영토를 확실히 구분해버린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유럽에서 배로 이곳까지 오려면 남아메리카를 지나와야 하고(참고로 태평양과 대서양을 이어주는 파나마 운하는 1914년에야 완공된다), 특별한 물품이 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1849년에야 비로서 영국은 이곳 Vancouver Island를 British Colony 지정하게 되었다. 


이 지역이 갑자기 북미 대륙에서 유명해 진 것은 1858년 Vancouver Island 옆에 있는 New Caledonia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은 이 땅이 미국에 넘어가지 않도록 아주 빠르게 이 부분까지 자신들의 Colony로서 지정하고 British Columbia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 금이 발견되자 많은 사람들이 금을 채굴하러 왔다↑ 지금도 BC주 Barkerville에서는 사금채굴 체험을 할 수 있다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이곳에는 약 3만명의 사람들이 유럽, 캐나다 동부지역, 미국, 중국 등 다양한 지역에서부터 건너오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이민자들이 갑자기 오는 것은 이곳의 First Nations 사람들에게 달갑지 않았다. 


영국으로부터 보호구역을 할당받았으나 갑작스런 금의 발견으로 인한 이민자들의 유입으로 무의미해졌고, 더구나 이들에 의해 천연두 감염으로 전체 인구의 1/3이 죽게되었다. (전쟁이 아니라 전염병에 의한 죽음이 더 많다니.. 면역.. 정말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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