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역사 : ③ 식민지를 위한 영국과 프랑스의 경쟁 (1600년대~)

영국의 캐나다 내 식민지 확대

프랑스에서도 식민지 개척에 관심이 많았지만 프랑스보다 더 식민지 확장에 심혈을 기울인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이 당시 영국은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업적을 이루어낸 엘리자베스1세 여왕에 의해 통치되던 때다. 

↑ 엘리자베스1세 여왕의 초상, 영국의 식민개척시대를 열었다 (출처: 위키피디아)↑ 월터롤리가 여왕에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하고 있다 (luminarium.org)


스페인 무적함대까지 격파하며 식민지 시대를 연 장본인 답게 재위 시절인 1583년에는 탐험가 험프리 길버트가 캐나다 뉴브런스윅 New Brunswick 주, Saint John 지역에 북미 최초의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였고, 이후 1584년에는 길버트의 이복형제인 월터롤리가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섬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세우게 된다. (1600년에는 인도에 동인도회사까지 설립한다.) 


또한 1610년 탐험가 허드슨 Hudson이 캐나다 북동부 지역을 항해하면서 빙하로 둘러싸인 거대한 만을 발견하며, Hudson Bay라는 이름을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부근에서 발견된 땅을 영국의 국왕 찰스1세는 그의 조카 Rupert에게 하사하고 이 땅의 이름을 Rupert's Land라고 붙인다. (현재 캐나다 영토의 1/3에 해당할 만큼 방대한 영역이다)

↑ Hudson Bay와 Rupert's Land. 정말 엄청 넓은 땅이다↑ Hudson's Bay Company의 모습


1670년에 Hudson Bay Company는 영국 왕실로부터 Hudson Bay 주변 Rupert's Land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인정받는데,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캐나다 내륙 지방에 대한 탐험이 이루어진다. 


특히 이곳의 원주민 언어를 할 줄 아는 Henry Kelsey에 의해 Manitoba, Saskatchewan 등의 Prairies지역에 대한 방대한 탐험이 이루어졌고, 퀘벡 지역에 근거지를 둔 New France와 캐나다 영토에 대한 탐험이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래서 경쟁이 중요한가...) 


캐나다 내 영국의 점령지는 점점 넓어져 갔고, 캐나다 내에 점점 더 많은 유럽의 이주민들이 들어오게 된다. 16, 17세기 유럽은 끊임없이 전쟁이 일어나던 시기다. 특히나 유럽 내 구교와 신교간의 종교 전쟁은 정말 치열하게 진행되었고,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은 거의 항상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교 구교간 종교 전쟁

구교와 신교 모두 크리스챤(기독교)이지만 구교는 정통 카톨릭으로 신성로마제국, 현재 스페인과 프랑스, 이탈리아 쪽에 여기에 속하게 되고, 프로테스탄트라고 불리우는 신교는 루터와 칼뱅 등에 의한 종교개혁으로 기존의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성경 중심의 신앙활동을 좀더 강조한다. 영국은 성공회라는 이름으로, 독일, 벨기에, 네덜란드 등은 루터교, 장로교 등의 이름으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기존 교황의 권위에 억눌러 있던 나라의 왕들은 이 기회에 개종을 단행하고 교황의 힘을 잘 활용하고 있던 나라의 왕들은 신교도들을 이단으로 강제로 탄압하고 결국 두 진영간에 치열한 전쟁으로 확대된다. 캐나다의 경우, 프랑스인들은 정통 카톨릭을, 영국인들은 프로테스탄트로서 서로의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아카디아(현재의 노바 스코시아, 뉴브런스윅)를 둘러싼 갈등

이러한 갈등은 캐나다 내 최대 요충지라 할 수 있는 아카디아 Acadia 지역에서 부딪히게 되었다. 아카디아 지역은 지금으로 보면 Nova Scotia와 Prince Edward Island, New Brunswick 지역을 말한다. 캐나다 동부에서 유럽에서 캐나다로 들어오는 바로 최접점에 있는 곳이고 퀘벡과 몬트리올로 가는 세인트로렌스 강의 하구에 위치하고 있는 곳이다. 


가장 입구에 있다보니 유럽에서 온 사람들이 가장 쉽게 자리 잡는 곳이기도 한 곳이다. 그렇게 아카디아 지역은 New France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홈 New Home'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유럽에서 범죄자, 가난한 사람, 고아 등 사회적 Minority들이 새로운 인생을 위해 이주해 온 곳이 이곳이라고 할 수 있다. 

↑ 아카디아의 위치, 그 아래 영국의 13개 식민지의 위치↑ 17세기 북미 대륙에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식민지 영토


프랑스계 정착민들이 잘 살고 있는 이 땅을 영국이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아카디아의 경우 프랑스는 카르티에 의해 발견된 지역이기도 하지만 영국은 존 캐벗에 의해 먼저 발견된 지역이다라고 주장하며 이름도 새로운 스코틀랜드라는 의미의 노바 스코시아 Nova Scotia라고 붙였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와 영국간에 끊임없는 분쟁이 있었고, 10여번의 전투 끝에 결국 1713년 영국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한 이 곳 지명도 프랑스인에 의한 아카디아에서 영국인에 의한 노바 스코시아, 뉴 브런스윅 같은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되었다. 


영국이 이 땅을 그렇게 집요하게 노린 이유는 이곳이 세인트로렌스강으로 들어가는 캐나다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요충지이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곳은 단순한 지리적 요충지일 뿐만이라 황금어장이 발달한 곳이었다. 어업.. 왜 중요할까? 당시 유럽에서는 종교적 신념으로 일주일에 한번은 고기를 먹어서는 안되는 날이 있었다(예수님이 죽은 금요일). 


이 날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생선이었다. 아카디아 지역은 대구 Cod 조업에 가장 활발했고, 대구는 지방이 적어서 빨리 상하지도 않아 육식을 대체하는 최고의 재료였다. 

↑ 대구잡이 어부들의 모습↑ 사방 천지에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널려있다


엄청난 어자원과 함께 이곳에는 또한 울창한 백송지대가 있었다. 캐나다 동부 지역에는 오랫동안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자연 그대로 상태로 남아있는 울창한 백송 Eastern white pine 숲지대가 사방에 널려 있었는데, 가볍고, 유연하며, 50m 이상 높이의 곧게 뻗은 나무들은 함선을 만드는데 필수적인 재료였다. 오늘날 가치로 환산했을 때 나무 한 그루당 $25,000까지 지불했다고 한다. 이건 거의 노다지라 할 수 있을 정도다. 


치열한 전투 끝에 패배한 프랑스. 여기에 살던 아카디아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영국 입장에서 프랑스계라고 할 수 있는 아카디아인들이 상당히 거북했을 것 같다. 프랑스와 전쟁도 심심찮게 할 즈음이었기 때문에 언제 이 사람들이 영국에 등을 돌릴지도 몰랐다. 결국 영국에 대한 충성 서약을 하거나 아니면 아카디아를 떠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다. 


아카디아인들 입장에서는 옛날에도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앞으로도 중립적인 입장을 가질 것이라고 했겠지만 이런 말이 통할리가 없고 거의 대부분 아카디아 지역에서 강제 추방을 당하게 되고, 교회와 집, 식량 등은 모두 불태워졌다. 그리고 이 곳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이주민들이 정착하게 된다. 

↑ 무자비하게 불태워지는 아카디아 정착지 마을 (출처: acadian-home.org)↑ 아카디아에서 추방당하는 프랑스계 사람들(출처: acadian-home.org)


7년 전쟁

영국은 아카디아 지역 이외에 New France 지역, 즉 퀘벡을 비롯한 몬트리올까지의 광대한 영역을 탐냈다. 이전부터 크고 작은 전투가 영국과 프랑스 간에 있었지만 공식적으로 1756년 양국간의 7년전쟁 Seven Year's War가 일어난다. 


프랑스쪽에서는 Montcalm이라는 걸축한 장군이, 영국쪽에서는 Wolfe라는 뛰어난 장군이 지휘를 했다. (Wolfe라는 이름도 정말 곳에서 지명으로 쓰인다) 그리고 이 전쟁의 하일라이트는 1759년 퀘벡 쟁탈전일 것이다.


↑ 퀘벡의 요새 위치를 보면 정말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까 싶다 (출처: 위키)↑ Wolfe장군은 요새 아래 절벽을 기어올라가는 기습을 했다 (출처: 위키)


퀘벡은 세인트로렌스 강을 통해 캐나다 내륙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도시이며, 오래 전부터 높은 절벽 위에 거대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요새 중의 요새라 할 수 있었다. 프랑스는 이곳에서 방어전을 준비하고, 영국은 이곳을 격파해야만 했다. 


이 당시 상황을 보면 New France는 본국으로부터 별다른 군사 지원을 받지 못한 반면에 영국은 이 지역을 빼앗기 위해 영국 본국의 해군 병력 1/4을 보낸다. 약 50여척의 군함과 11,000여명의 잘 훈련된 병사들이 이곳으로 보내졌다. Montcalm의 프랑스군 역시 15,000명 정도로 적지 않은 군사 규모를 갖고 있었지만 대부분 전문적인 훈련을 받지 못한 군인들이었다.


이 당시 캐나다의 각 식민지역에 들어와 있던 영국계 사람들은 거의 150만명에 육박한 반면, 프랑스는 먼저 이 곳을 개척했음에도 인구가 겨우 75,000명 밖에 되지 않았다. 인구 대결만으로 20:1의 싸움. 영국이 훨씬 많은 물자를 투입할 수 밖에 없었고, 프랑스는 필사적으로 버텨야만 했다. 


하지만 프랑스의 장군은 요새를 나와 요새 앞의 아브라함 평원 Plains of Abraham에서 영화에서 많이 봤던 서로 마주보고 한 발씩 앞으로 나가며 총을 쏘는 그런 고전적인 전투를 한다. 그리고 승리는 당연히 잘 훈련된 영국에게 돌아갔다. (드라마 도깨비를 보면 아브라함 평원 장면이 나온다. 도깨비의 묘비가 있던 곳... 아... 가보고 싶다.. 드라마보다는 역사적으로 의미있는 곳이기에)

↑ 과거에 지어진 요새가 현재까지도 그대로 남아 있다↑ 이 평원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이듬해인 1760년에는 몬트리올이 영국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고 이제 캐나다에서 프랑스는 식민지를 잃고 모든 영토가 영국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몬트리올 전투가 끝나면서 큰 전쟁은 거의 종료되었으나 이 뒤로도 약 3년동안 작은 국지적인 전투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식적인 7년 전쟁의 끝은 1763년이다. 


전쟁의 여파는 언제나 그렇지만 참 크다.. 뉴프랑스라는 이름은 이제 없어지고 다시 퀘벡이라는 이름으로 돌아갔고, 카톨릭 성당은 모두 파괴되었고 성직자들도 많이 죽었다. 가옥이나 식량은 당연히 전쟁 중에 불타버렸고.. First Nations과의 모피 거래도 금지되었고, 9시 넘어서 나와 돌아다니는 것도 금지되었다. 또한 뉴프랑스 지역에 있던 프랑스계 사람들은 프랑스문화를 버리고 영국문화를 받아들이고 영어를 쓰도록 강요받아야만 했다. 

↑ 7년 전쟁 전후 북미영국식민지 확대, 핑크까지 넓어진다 (출처: 위키피디어)↑ 18세기 북미 대륙에서 영국의 식민지 영역 (출처: Epic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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