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역사 : ⑩ 산업화 시대 노동환경 변화와 이민정책 (1880년대~)
- 캐나다 역사 경제 정치 사회
- 2019. 4. 28.
캐나다 역사에서 1880년대는 산업화 시대 Industrialization Age라고 불리어진다. 사람들의 손에 의해 무언가 만들어지는 시대에서 이제 본격적으로 기계에 의해 만들어지는 시대로 바뀐 것이다. 공장 뿐만 아니라 농장에도 새로 발명된 기계들이 사용되기 시작했고, 더 이상 농장에서 많은 노동력이 필요없어짐에 따라 이들은 직업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의 위력이 본격적으로 발휘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으로 더 큰 기계를 도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더 큰 소득을 올린다... 기계 덕분에 인건비는 더 떨어질 수 밖에 없고, 이건 돈이 있는 부자들은 더 큰 부자가 되게 해주고 가난한 노동자들은 더 가난하게 만드는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의 결과를 만들어낸다.
토론토와 같은 대도시에는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직업을 찾아 몰렸고, 이들을 쉽게 이동할 수 있도록 전차가 도시 곳곳에 깔리기 시작했다.
여성들의 취업
189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자전거가 보급되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그전까지 자전거는 체인없이 앞바퀴를 발판으로 회전시켜 갔다면 이제부터는 체인을 통해 뒷바퀴가 돌아가게 되었고, 공기타이어가 결합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몰고 왔다.
↑ 이동의 자유를 얻은 여성들↑ 여성들은 저렴한 인건비에 더 꼼꼼한 일처리로 환영받았다
교통수단이 자유로워지면서 여성들도 이제는 집안일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깥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게 되었다. 여성들은 남성들보다 더 저렴한 인건비로 활용할 수 있었고, 남성들보다 더 꼼꼼하고 친절한 덕분에 비서와 같은 서비스업, 방직업 등에서 특히 인기가 많았다.
또한 어렸을 때 스코틀랜드에서 캐나다로 이민을 와서 살았던 그레이엄벨이 1876년 전화를 발명하고 이를 상용화하면서 많은 전화교환수가 필요했는데, 이 때 거의 대부분의 직원이 여성들로 이루어졌었다.
↑ 그레이엄 벨이 전화개통 시연을 하고 있다↑ 전화교환수는 대부분 여성
아이들의 의무교육 시작
아이들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는데, 19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13세 아이들도 하나의 일꾼으로서 인식되었고 10세가 되면 대부분 일을 하러 가야되기에 학교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기계에 의한 노동생산성이 높아지면서 이제 아이들까지 일을 할 필요는 없어졌다.
그러면서 이제 아이들은 교육을 받고, 놀아야될 존재로 인식이 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교육도 정부에 의해 무상으로 지원되는 의무 교육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 개신교를 중심으로 Public School이 시작된다↑ 학교가 없을 경우에는 교회에서 진행되기도 했다
이 당시 의무교육을 주도한 사람은 개신교 목사로서 모든 개신교 아이들이 의무 Public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 때문에 카톨릭학교는 의무 Public School이 아니라 Private School로 남게 되었다. 캐나다에서 왜 카톨릭학교는 별도로 있을까 궁금했는데 다 이유가 있었다.
노동조합과 노동쟁의
산업이 발달하면 당연히 노동환경이 악화된다. 1872년 캐나다 연방 정부는 합법적으로 Trade Union (동일 업무분야 사람들끼리의 조합)을 만들 수 있는 법규를 통과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조합만으로 쉽게 노동 환경이 바뀌지는 않았다. 자본가들의 파워는 여전히 막강했고, 노동자들의 파업, 쟁의활동에 사업가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이것과 유사하게 노동자들은 Knights of Labour라는 직무분야, 계층을 초월한 노동자단체를 만들어 단체행동에 하서기도 했지만 역시 자본의 힘에 대적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회에서도 산업화 초기에 이러한 노동쟁의, 노사갈등을 관찰할 수 있듯이, 캐나다 역시 1900년대 접어들면서 많은 갈등을 접하였고, 서서히 노동자들의 권리가 개선되어 갔다.
↑ Knights of Labour 단체의 노동쟁의와 시가행진↑ 전차를 쓰러뜨리는 시위 가담자
이민 장려 정책
산업이 발전하면서 도시 인구는 급격하게 늘어났지만 캐나다 중부의 방대한 땅은 여전히 많은 이민자, 특히 숙달된 농부가 필요했다. 특히 1896년부터 새롭게 구성된 정부의 내무부 장관인 Clifford Sifton은 이를 위해 유럽의 신문에 광고를 내고 캐나다 이민자 농부의 경험담을 실은 팜플렛을 제작하는 등 다양한 홍보를 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유럽 각 지역에서 엄청난 이민자들이 들어온다.
↑ 캐나다 이민 장려 홍보 포스터↑ 대부분 캐나다 중부와 서부 지역으로의 이민 홍보다
이 당시 Manitoba의 인구는 겨우 15만명이었지만, 홍보를 시작하고 나서 20년만에 45만명에 육박하게 된다. 이 당시에 이민을 온 사람들을 보면 영국 뿐만아니라 우크라이나, 헝가리, 루마니아, 독일, 폴란드, 아이슬란드, 러시아, 중국 등 정말 다양한 나라 출신들이었다.
종교박해를 피해온 이민자
이들 중에서는 정말 새로운 기회를 찾아온 사람들도 있지만 러시아의 두호보르파 Doukhobors (러시아 정교회 출신의 평화주의자로 양심적 병역거부 주장, 두코보라고 부르기도 한다)나 유대교 Jewdish(독일 나치 이전부터 유럽 내 유대인들에 대한 차별과 증오는 심했다)처럼 종교적 박해를 피해 조국을 떠나 온 사람들도 많았다.
두호보르파의 경우, 캐나다로 이민을 온 후에도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강한 고집이 있었다. 이 당시 캐나다는 다수의 개신교와 소수의 카톨릭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여기에 기존 기독교와는 상당히 다른 교리를 주장하는 이들을 캐나다에서도 반겨주지는 않았다. 이들은 세금이나 투표에도 반대하고,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가르치는가 하면, 자신들의 집이나 정부 건물에 불을 지르던가, 알몸 시위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쩌면 이런 일련의 행위 때문에 이곳에서도 차별과 핍박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 러시아 정교회의 두호보르파의 시위↑ 종교적 권리를 주장하며 저지른 방화
Bloc Settlements
보통 이 이민자들은 Bloc Settlements라는 하나의 공동체가 일정 크기의 땅에 함께 거주하는 방식으로 정착을 하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의 품앗이처럼 같이 집을 짓고 함께 일을 도와주면서 정착을 해나갔다. 캐나다 정부는 이 허허벌판 뿐인 곳을 이들 이민자를 통해서 효과적으로 농장으로 변모시켰다.
↑ Alberta의 노르웨이 이주민 지역↑ Manitoba 지역의 유태인 거주 지역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이민자들이 잘 정리해 놓은 땅을 영국 이주민에게 할당해 버리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 당시 이민자들도 정부 정책에 따라 참 어려운 시기를 보낸 게 맞는 듯하다.
어쨌든 이 당시 많은 나라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은 보통 캐나다 중부 지역에서 집단으로 정착을 하게 되었고 지금도 그 지역에서 자신들만의 종교, 문화 등을 간직하며 살아가고 있다.
중국인에 대한 차별
특히 중국인들의 경우, 특히 차별히 심했다고 할 수 있다. 1870년대 동서를 잇는 Canadian Pacific Railway 공사에 필요한 저렴한 인건비의 노동자들이 많이 필요함에 따라 중국 본토에서 17,000여명이 들어왔으며 그 이후로도 꾸준히 계속 이민을 왔는데, 철도 공사가 끝나가면서 이제 더 이상 중국인 노동자들이 필요하지 않음에 따라 중국인들에게 한 해서 인두세 Head Tax를 도입하기도 했다.
↑ 철도 공사 중 힘든 코스에 투입되었던 중국인 이민자들↑ 어렸을 때의 Head Tax 확인증을 들고 있는 할머니
1885년에 처음 도입되었을 때는 입국할 때 $50로 설정되어 있었으나 서서히 증가해서 1903년에는 무려 10배인 $500까지 이르렀다. 당시 중국인 노동자의 하루 일당이 겨우 $1였음을 가정하면 참으로 가혹한 세금이었다.
중국인들 뿐만아니라 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유럽의 영어권이나 프랑스권 사람들이 아닌 이민자들에 대한 차별도 점점 커져만 갔다. 특히 유럽권과 완전히 문화가 다른 아시아권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러한 차별이 심했는데, 폭력이 이루어지거나 이들이 하고 있는 사업체를 약탈하거나 파괴하는 등의 사건들이 많이 발생했었다.
↑ 중국인에 대한 차별을 표현한 카툰↑ 약탈, 방화를 당한 일본인 상점
이민자 제한 정책
많은 이민자가 필요했던 캐나다가 어느 정도 이민자들로 인한 노동력이 충당되고, 또한 새롭게 온 이민자들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발생하자 이민자 제한 정책을 펼친다.
1908년부터는 이민자들의 유입을 제한하기 위해 Continuous Journey Regulation라는 이민자는 반드시 그 출신 나라에서 와야한다는 이상한 규정까지 만들었다. 미국 흑인은 아프리카 자신들의 본국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캐나다로 이민올 수 없었고, 홍콩에서 출발하는 배를 탄 인도 사람들은 캐나다에 도착해서 입국이 거절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 Continuous Journey Regulation 입국 거절되는 시크교도들↑ 백인에게 우호적이었던 캐나다의 이민 정책
백인들의 이민은 적극 환영하지만 유색인종의 이민에 대해서는 폐쇄적인 정책을 펼친 것이다.
캐나다는 이민자들에 의해 새워진 나라이지만 결국 영국 중심의 이민자들만을 우대하고 그외의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많은 희생을 요구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러한 많은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을 존중하는 사회가 되었으니 역사란 참 배울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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