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역사 : ⑪ 영국을 위한 나라인가, 독립국가인가에 대한 논쟁 (1900년대~)

1900년대 산업이 발전하고 이민자들이 더욱 많이 들어오면서 캐나다는 영국계 이외에 정말 다양한 출신들로 구성된 나라가 된다. 자연스럽게 영국계 사람들은 여전히 영국과의 깊은 유대감을 강조한 반면, 다른 사람들은 캐나다를 독립국가로서 영국과의 독립적인 정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당시 캐나다는 대영제국(Imperialism)의 한 일부분일 뿐, 독립국가는 아니었다. 1867년 캐나다 연방이라는 독립국가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기는 했지만 영연방국가로서 캐나다의 군주는 영국의 국왕으로 되어 있었고, 캐나다 연방 정부의 중요한 결정은 모두 영국에 의해 결정이 되고, 최고 헌법 기관 역시 영국의 헌법기관이었다. 별도의 외교권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 빅토리아데이.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날이다. ↑ 빅토리아 데이는 여름으로 가는 시작으로 캐나다 축제일이다


캐나다의 Confederation을 승인한 빅토리아 여왕은 캐나다 화폐의 모델이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생일인 5월 24일은 지금도 캐나다 국경일로 지정되어 있으며(여왕이 사망한 1901년 이후 생일을 국경일로 삼았고, 1953년부터 생일 전 월요일로 변경되었다, 또한 현재 엘리자베스 여왕의 생일도 이 날 축하한다), 영국의 국가인 "God Save the Queen" 는 여전히 캐나다 국가처럼 인식되었고 캐나다의 국기는 영국의 유니언잭과 캐나다 연방의 상징이 함께 결합되어 있었다. 


↑ 이전 캐나다 국기에서 보이는 영국의 상징↑ 캐나다에서 영국왕실은 여전히 군주로서 존경받는다


캐나다의 영국계 사람들은 영국 여왕이 자신들의 군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영국의 요청과 결정을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계 이외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요청은 터무니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배하에 있을 때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군대에 동원한다면 이걸 축복이라고 여겨야 할까 아니면 터무니없는 요청이라고 해야할까.. 당연히 터무니없는 것이다. 친일파 권력층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아마도 이 당시 캐나다 내에서도 영국계가 아닌 다른 국가 출신들에게 똑같이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보어전쟁 Boer War

1899년에 영국은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 정착민인 보어인들과 전쟁을 하게 된다. 원래 이 남아프리카 땅은 네덜란드의 식민지였으나 네덜란드가 프랑스에 점령되면서 통제가 불가능해지자 영국이 이땅을 점령해 버렸다. 그리고 이 땅에 있던 보어인들은 점점 더 북쪽으로 떠났는데, 처음에는 영국도 이들이 옮겨간 땅을 독립국으로 인정했으나 이 지역에서 금과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영국은 다시 이 지역까지 자신들의 영역을 선언하며 보어인들의 반발을 샀다. 이 전쟁은 의외로 네덜란드 이외에 독일,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 러시아 등이 보어인 편을 들며 국제전으로 흘러갔고, 영국은 영연방의 국가들에 지원 요청을 하게 된다. 


↑ 보어전쟁 전 남아프리카의 영역 구분↑ 굳이 이런 전쟁을 할 필요가 있었을까 궁금하다..


영국의 군대 지원 요청에 캐나다는 다시 극심한 찬반 논쟁이 진행되었는데, 프랑스계나 다른 이민자들이 보기에 캐나다와 아무 관계도 없는 나라에 가서 전쟁을 하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았다. 결국 캐나다는 강제 징집이 아닌 자발적 자원 형식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7,000여명 이상의 영국계, First nations, Metis 사람들이 남아프리카에 가서 대영 제국을 위해 전쟁을 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캐나다의 첫번째 해외 원정 전쟁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남아프리카 일대는 영국의 영역이 된다. 


↑ 보어전쟁에 참전하는 캐나다군↑ 토론토 중심가에 있는 보어전쟁 기념탑


알래스카 팬핸들

1896년 캐나다 북서쪽 끝자락 Yukon Territory의 알래스카 접경 지대인 클론다이크Klondike에서 이전 브리티쉬 콜럼비아처럼 금이 발견되었다. 또다시 황금을 찾기 위한 Gold Rush가 이루어졌다. 한가지 더 중요한게 있다면 미국의 개입이다. 캐나다와 알래스카 간 국경선은 러시아가 미국에 알래스카 땅을 팔기전부터 명확하게 선이 그어져 있는게 아니었다. 금이 발견되면서 미국은 서서히 밑으로 내려와 캐나다 영역까지 자신들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마치 후라이팬의 핸들처럼 생겼다고 해서 알래스카 팬핸들이라 불리운다


↑ Russian America 주식회사의 선언 영토 모습. 허드슨베이 비슷한 회사↑ 캐나다 땅에 캐나다는 소외되고 미국과 영국에 의해 국경이 정해진다


이 국경 분쟁과 관련해서 캐나다는 독립된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외교권한이 없고, 영토와 관련해서 영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국경 분쟁은 결국 1903년 미국대표3명, 캐나다대표2명, 영국대표1으로 구성된 협의단에 의해 타결이 되었는데, 결과는 4:2로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 알래스카 팬핸들을 인정하되, 더 이상 미국은 캐나다의 영토를 잠식하지는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 하늘색 미국주장, 붉은색 캐나다주장, 노란색 최종 결정↑ 알래스카 땅이 길쭉하게 밑으로 늘어있는 걸 처음 알았다


캐나다 국민들은 당연히 영국이 자신들 편을 들어줄 것으로 예상했으나 영국은 미국 편을 들어줬다. 영국을 위해 전쟁까지 참여했지만 돌아온 것은 없다라는 인식이 퍼졌고, 그동안 영국을 위한 캐나다의 충성은 큰 실망감을 준 채 수그러들었고 독립국가로서 캐나다가 거듭나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다. 또한 이 결과 1909년에는 외교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외무부가 설립된다. 


캐나다 해군 창설

알래스카 팬핸들 분쟁을 계기로 캐나다 내 영국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영국은 1908년 자국의 해군 증강을 위한 지원금을 각 영 연방 Dominion 국가(식민지는 아니며 자치를 하고 있는 국가로서 호주나 뉴질랜드, 캐나다 같은 대영제국 아래에 있는 Semi-independent nation를 말한다)에 요청한다. 


이전 같으면 적극적으로 요청에 응했겠지만 캐나다 내 여론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국의 요청을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캐나다 연방 정부에는 지원금을 내는 대신에 1910년 캐나다 내에 자국의 해군을 창설해서 필요시 군대를 지원하도록 한다. 


↑ 2차세계대전때 캐나다 해군함정. U-Boat를 침몰시킨 배다↑ 오늘날 캐나다 해군 모습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캐나다는 영국의, 영국에 의한, 영국을 위한 나라에서 이제 서서히 독립 국가로서 발돋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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