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역사 : ⑫ 1, 2차 세계대전과 완전한 독립

오늘날 캐나다를 가장 발전시킨 원동력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바로 이민자와 전쟁이 아닐까 싶다. 특히 1, 2차 세계 대전이 유럽에서 일어나면서 비록 자국 국민들의 희생이 있기는 했지만 캐나다 땅에서의 피해는 거의 입지 않고 경제 발전과 기술 발전을 이루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1차 세계대전


■ 전쟁의 시작

1914년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다. 형식적으로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대공 암살이 계기가 되었지만 실질적으로는 기근과 경기 위축, 영토 분쟁, 민족주의 등 다양한 요인들이 전쟁의 원인으로 작용되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과 같은 유럽의 강자들은 이미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어 그 식민지를 통해 자원 공급과 소비가 가능했지만 유럽의 신흥 강자로 떠오른 독일은 그렇지 않고 고스란히 경기위축의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다. 또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경우 유럽 내에서 더욱 강력한 세력을 과시하고 싶었고, 이를 저지해야만 하는 다른 주변국들간의 갈등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졌다. 


↑ 1차 세계대전의 촉발인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대공 암살↑ 독일, 오스트리아, 오스만 vs 영국, 프랑스, 러시아


영국은 원래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려 했으나 독일의 전쟁선포에 프랑스가 맞대응하겠다고 선포하고 실제 자국 관련 영토에 독일이 침략하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 캐나다의 참전

그리고 영국이 참여하면서 영연방의 국가들에 전쟁 참여를 요청한다. 이제껏 영국의 이름으로 전쟁에 참여한 캐나다는 이제 캐나다라는 이름을 걸고 얼마전 창설된 해군과 함께 육군을 대동하고 전쟁에 참여한다. 


역시 강제 징병이 아닌 지원에 의한 참여. 3년 뒤에는 다시 징집령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강제보다는 자발적 참여가 많았다. 그리고 무려 60만명 이상의 캐나다 군인이 전쟁에 참여를 했다. 이 당시 캐나다 인구가 겨우 800만명 정도였으니 엄청난 인원이 전쟁에 동원된 것이다. 


↑ 전쟁 참여를 독려하는 포스터↑ 전쟁에 참여하러 떠나는 캐나다 군인


■ 비미 릿지 전투

1차 세계대전 중 캐나다가 가장 거둔 가장 큰 승리는 비미 릿지 Vimy Ridge전투다. 아마 왠만한 캐나다인들은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캐나다 역사에서 기념비전인 전투라고 할 수 있다. 


비미 릿지는 프랑스 북부에 있는 독일군의 방어 요새로서 독일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철조망과 3중 참호, 대규모 포병과 기관총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전 전쟁과 1차 세계 대전의 가장 큰 다른 점이 바로 참호 전략과 기관총인 듯하다. 


이 두가지는 많은 사상자를 내기도 하였고 또 당시에는 새로운 전략이었기에 공략이 쉽지 않았다) 연합군이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몇 번의 시도했지만 그 때마다 실패했고, 프랑스군의 경우 15만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 비미릿지전투. ↑ 캐나다의 전투력을 다시 보게 만들어준 계기가 된 전투


이제 캐나다가 이 곳 전투에 참여할 차례.  당시 영국이나 프랑스군은 돌격할 때 그냥 1자로 쭉 늘어서 공격하는 아주 고전적인 방법을 썼다. 독일의 기관총을 이겨낼리 없는 방법이다. 캐나다 지휘관은 전문군인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보험설계사였던 아서커리 Arthur Currie은 이전의 연합군 작전의 실패를 교훈삼아 단순 돌격이 아닌 소대 단위 참호 무력화 전략을 철저히 훈련하였다. 


몇몇 지휘관들만 작전을 알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소대원들이 작전을 철저히 이해하고 실행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실제 새벽에 영국군의 엄청난 포격과 함께 독일군 참호를 진격 무력화함으로써 연합군의 대승을 가져왔다. 연합군이 1년반만에 처음 거둔 승리였기에 이 전투가 얼마나 중요한 전투였는지 짐작이 간다. 


↑ 비미릿지의 현재모습. ↑ 비미릿지 전투 기념탑


■ First Nation의 활약

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캐나다 군인은 프란시스 패가마가보우 Pegahmagabow 라는 First Nation 원주민이다. 그는 백인들에게 고통당해온 자신의 부족 위상을 높이고 좀더 나은 혜택을 받기 위해서 참전했다. 패가마가보우는 처음에는 연락병으로 참여했다가 이후 저격수로 변경되었다. 


↑ 페가마가보우의 모습↑ First Nations들은 게릴라, 저격, 유격전에 익숙한 사람들


캐나다에서는 예전부터 많은 First Nation 부족들이 저격수로 활동을 많이 해왔는데, 그 역시 이 특기를 잘 살려 약 400여명의 독일군을 저격 사살해서 독일군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연합군에게는 전쟁의 영웅이었다. 패가마가보우는 종전후에는 캐나다로 돌아와 원주민을 위한 조직 설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렸고, 그 덕분에 현재 the Assembly of First Nations이라는 캐나다에서 가장 큰 원주민 권리를 대변하는 단체가 만들어졌다.


■ 전쟁 후방 지원

1차 세계대전에는 캐나다 남성들만 참여한 것이 아니라 학생들도 Soldier of Soil 이라는 이름으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식량 농사와 배송에 관여했고, 여성들은 무기를 만들거나 간호병으로 전쟁의 승리를 도왔다. 또한 캐나다 본토에서의 전투 가능성에 따라 실제로 방어 연습에 나서기도 했다. 1차 세계 대전 때 여성들의 활약은 여성들의 인권을 드높이는 계기가 되었는데, 특히 여성에게도 선거 투표권이 생기면서 본격적으로 여성 참여의 서막을 시작하게 되었다. 


↑ 캐나다 본토 방어를 위한 여성들의 훈련↑ 전쟁 일선에 가지 않고도 전쟁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


■ 전쟁의 종료

↑ 전후 쪼개진 오스트리아, 독일, 오스만의 영토들↑ 1차세계 대전의 사상자 수. 색이 진할수록 피해가 크다

1차 세계대전은 약 100만명이라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전쟁이기도 하다. 특히, 캐나다는 사망자 67,000여명, 부상자 17만여명이라는 큰 희생을 치렸다. 하지만 전쟁 종료를 선언하는 베르사유 조약(1919년)에서 캐나다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독립된 나라로서 서명을 하게 되었는데 이는 세계 여러 나라에 처음으로 캐나다라는 이름을 알리고 신생국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종료일인 11월 11일은 캐나다에서도 Memorial Day로서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 Memorial Day 행사↑ 이 희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캐나다가 있었으리라



독립국가로서 캐나다

그리고 1926년 영국 의회에서는 두번째 벨푸어선언 Balfour Declaration을 통해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프리카공화국, 아일랜드와 같은 영국의 자치령들이 대영제국 내에서 영국에 종속되지 않고, 평등하고 자치적인 사회임을 규정하였고, 1931년 웨스트민스터 조례 Statute of Westminster에 의거해서 전면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아 완전한 독립국가로서  국제사회의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여전히 혼동스러운게 캐나다 독립일은 1931년인지 아니면 연방이 수립된 1867년인지 헤깔린다)


↑ 각 나라들의 독립 연도


하지만 여전히 한가지 제한 사항이 있었는데, 캐나다 헌법은 1867년 캐나다 연방을 공식 승인한 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 British North America Act로서 이에 대한 개정 권한은 여전히 영국에 있었기에, 헌법 개정 권한을 가져야 된다는 여론은 계속 되었다. 



전후 경제 상황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럽은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었지만 미국과 캐나다는 이를 위한 산업이 발전하면서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특히 1차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던 1914년에는 알버타주에서 석유와 가스까지 발견되었으니 그야말로 호재들의 연속이었다.


↑ 석유, 가스의 발견↑ 캐나다는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다..


1929년 대공황이 발생되기 전까지 미국과 마찬가지로 캐나다 역시 매일 주식 가격이 올랐다. 당연히 은행으로부터 빚을 내서 주식에 투자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게 하더라도 충분한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은행은 돈을 퍼줬고 투자는 활발했다. 실물경제가 아닌 거품이라고 해야하나... 


어쨌든 미국을 시작으로 주식시장이 폭락하고 은행은 돈을 거둬들이기 시작한다. 대공황 때 주식 가격의 89%가 사라졌으니 소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수입도 이루어지지 않고, 은행은 돈을 거둬들이지 못해 도산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캐나다 직장인의 1/3이 실직을 당하게 되었고 직업을 간신히 구했던 사람도 $1달러도 안되는 임금을 받았으니 불만이 극에 달했다. 


↑ 세계대공항 때 뉴욕주식 시장의 주식 가치 하락 그래프↑ 실업자들을 위한 무료 식사 배급


미국발 대공항은 주변국으로까지 퍼져갔고 모두가 힘든 시기를 거친다. 그나마 땅덩어리가 큰 나라는 정부 주도하에 개발을 통해 이를 극복해 갔으나 유럽은 그렇지 않았다. 



2차 세계 대전

■ 전쟁의 시작과 참전

1차 세계대전 폐전국으로 독일 경제는 엉망이 되어 버렸다.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만 했다. 오스만제국은 그 넓은 영토를 다 잃어버리고 터키라는 나라 정도로 축소되었다. 


너무 가혹한 배상금은 결국 또다른 시련을 가져다 왔다.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에 매료되었고, 극우 성향의 나치 당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발생한 세계경제 대공황은 전쟁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이 된다. 안 그래도 어려운 나라의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공장에서 물건을 만들어도 팔 때가 없다.. 


그래서 독일은 이러한 생산력은 군사무기를 만드는데 활용한다. 첨단 기술이 기업의 경제활동에 쓰이는 게 아니라 군수산업에 동원이 된다. 히틀러가 단단히 칼을 갈았다고 해야하나... 군사무기를 꾸준히 만들고 어떻게 다른 나라를 공략할지 미리 계획까지 다 만들어놨었다. 


그리고 주위의 작은 나라들을 강제로 합병하기 시작한다. 


↑ 독일과 이탈리아 연맹으로 전쟁이 시작된다 (출처: Gifex)↑ 1942년 유럽 지도. 독일의 엄청난 군사력을 보여준다


주변국들은 그런 독일에 전쟁을 하기도 전에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독일의 히틀러는 영국에게 자국의 유럽 내 영토 확장(특히 폴란드)에 개입하지 말 것을 요청했으나 영국의 처칠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독일은 폴란드를 무력으로 침공했고, 영국은 이에 대한 항의로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또다시 독일과 영국을 대표로 하는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캐나다는 다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 


■ 경제 회복의 계기

그리고 전쟁은 대공황으로 막혔던 수출이 군수물자용으로 다시 시작되고 공장은 다시 문을 열고 무기를 만들어낸다. 남의 나라의 불행은 우리 나라의 행복으로 연결될 수 밖에 없었다. 


↑ 캐나다 온타리오주의 전투기 훈련장↑ 조선소에서는 전함이 10여척 이상 건조된다


전쟁에 필요한 전투기, 전함을 비롯한 각종 무기류를 만들 곳이 필요했는데, 영국은 독일 전투기의 폭격 위험이 컸고, 미국은 아직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안전하게 전쟁 물자를 제작하고 조달할 곳이 필요했다. 물리적 거리나 안정성 측면에서 캐나다는 적격이었다. 또한 비행기 조종사나 병사 훈련을 위한 장소로도 캐나다만한 곳이 없었다. 


■ 전쟁을 통한 기술 발전 

1차 세계대전과 달리 2차 세계대전은 단순한 보병전이라기보다는 전투기들에 의한 공중전, 첨단기술에 의한 전략폭격과 각종 기계화된 무기들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캐나다의 경우, 미국의 기술력에 비할 바는 안되지만 대서양을 담당하며, U-boat를 침몰시키거나 포획하기도 했다. 또한 독일 공군은 Glide Missile이라는 유도미사일을 만들어 공격할 때, 이 역시 캐나다 대학의 물리학자에 의해 비밀이 파헤쳐져 전함에 방어용 라디오주파수 기기를 탐재시켜 방어하는 등 강력한 전략무기 개발의 동반자 역할을 하게 된다.


■ 노르망디 상륙

↑ 노르망디 상륙작전 전개도 (출처: CosmoLearning)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캐나다가 맡은 상륙지역은 노르망디의 Juno Beach. 첫날 연합군은 약 10,000명이라는 엄청난 사상사가 발생했고 이 중 4,000여명이 사망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또한 이 중에서 약 1,000여명은 캐나다군인일 정도로 피해가 컸다. 하지만 캐나다가 상륙한 Juno Beach는 15분만에 상륙에 성공해 독일의 후방 방어 기지를 섬멸했고, 옆의 영국군이 상륙하는 골드비치의 독일군 후방까지 차단해서 상대적으로 쉽게 영국이 상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First Nation 원주민들은 이 전쟁에서도 보병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하였고,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은 프랑스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을 안전하게 프랑스 밖으로 구출하는데 기여하는 등 캐나다 군인은 이제 확실히 영국의 들러리가 아니라 영국의 핵심 파트너가 된 것이다. 


↑ 캐나다의 상륙 개시↑ 엄청난 희생을 동반했지만 순식간에 점령한 해변


■ 남성과 동등한 일을 하는 여성

전쟁 중에 나온 또다른 큰 특징은 성인남성들이 전쟁의 일선에 참여해야했기 때문에 여성 노동자들의 참여가 비약적으로 늘어나고 경제 주축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된다. 이전까지 여성들이 주로 했던 일들은 기껏해야 비서나 전화기 교환수 같은 간단한 일이었지만 이제는 선박건조와 같은 중공업 분야에도 여성이 들어가 핵심역할을 하게 되었다. 


↑ 이제 여성들은 폭탄을 만들고 전함까지 만들게 된다. ↑ 힘든 중공업분야에서도 여성의 힘이 발휘된다.



비약적인 성장

1945년 2차 세계 대전은 종료되었다. 그리고 이 전쟁은 캐나다 경제, 산업, 과학기술에 비약적인 성장을 다시 가져다 주었다. 또한 전쟁의 결과로서 보유하게 된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1945년 UN이 설립될 때 창립멤버로 참여하였고 1949년 NATO (북대서양조약기구)가 만들어질 때도 창립멤버로 참여한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1950년 한국전쟁 때는 UN의 멤버로 참전해서 한국이 오늘날 자유대한민국으로 남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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