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역사 : ⑭ 차별을 뛰어넘어 조화를 꿈꾸는 나라

캐나다는 매우 다양한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나라다. 하지만 어쨌든 백인, 특히 영국계가 사회 주류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국계 중심의 사회가 다양성 존중의 나라로 변화되는 과정이 마냥 순탄하지는 않았다. 


함께 전장에서 캐나다를 위해 싸웠지만 전쟁이 끝나고 캐나다 사회로 다시 들어오면 보이지 않는 차별과 탄압은 그치지 않았다. 어디에서는 그렇듯이 캐나다에서도 마이너러티 Minority는 그러한 차별과 탄압 속에서 끊임없는 요구와 투쟁을 통해서 오늘날과 같은 권리, 대우, 존중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런 시련의 과정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날과 같은 다양성 존중의 사회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여성

오타와를 여행하다보면 국회의사당 동관 부근에 5명의 여성 동상(The Famous Five) 동상이 있다. 이 중 한 여성이 들고 있는 문서에 적혀 있는 글귀를 보면 "Women are Persons"이라고 적혀 있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우습기까지 하지만 192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여성은 법률적으로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다. 오직 남성들만이 사람으로 여겨지고 남성들만이 선거에 참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산업이 발달되고, 전쟁에 남성들이 참전하며 여성들이 남성들이 하던 일을 하게 되며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그 결과, 1916년 마니토바주에서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하게 되고, 1918년에 연방정부에서 여성투표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된다. 선거권과 별도로 1867년 지정된 캐나다가 연방국가임을 선언하는 헌법(영국령 북아메리카 조례)에 따르면 Qualified Person을 상원의원으로 지명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1928년 5명의 여성이 Qualified Persons에 여성이 포함되는지에 대해 소원을 낸다. 하지만 1928년 대법원의 결정은 합헌으로 여성은 사람에 속하지 않는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 Famous Five의 동상↑ Women are Persons...


당시 사회가 얼마나 여성에게 보수적인지 보여주는데, 이 다섯 여성은 여기에 굴하지 않고 캐나다 최고 항소법원인 영국의 추밀원Privy Council에 이의를 제기하게 된다. 그리고 1929년 추밀원에서는 Persons에는 남성과 여성 모두 포함된다며, 위헌으로 최종 결정 내린다. 이제 여성도 Qualified Persons으로서 인식될 수 있었다. 


↑ 캐나다 여성 권익 향상의 주역들

이 판례가 나온 뒤 넉 달 후 1930년, Cairine Wilson이 최초의 여성 상원으로 지명된다. 여성인권은 그 뒤로 꾸준히 높아져 1984년에는 Jean Sauve가 최초의 여성 총독으로 임명되고, 2000년에는 Beverley McLachlin이 여성 대법원장으로 임명된다. 아마 곧 여성 총리도 나오지 않을까 싶다.


↑ 최초의 여성 총독 Jean Sauve↑ 최초의 여성 대법원장 McLachlin


흑인

1940년대 후반, 노바 스코시아의 Halifax.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백인과 흑인 간 암묵적인 차별이 존재했다. 특히 흑인이 갈 수 없는 백인들의 구역이 존재했는데, 영화관의 경우 1층은 백인만 앉을 수 있고 흑인은 2층 발코니석에만 앉아야 한다는 것. 


비올라 데스몬드라는 한 흑인 여성이 영화관을 갈 때 매표 직원이 흑인인줄 모르고 1층 티켓을 끊어준 일이 있었다. 이 여성은 자리를 옮겨달라는 요청을 무시하고 자기 구매한 티켓에 맞는 1층 자리를 계속 고수했다. 결국 끌려나가 감옥에서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흑인 인권에 대한 이슈가 확산되고 결국 소송으로 이어진다. 


↑ Viola Desmond의 모습↑ 흑인 인권 관련 다큐의 한 장면(출처: CBC)


소송의 결과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잘못되었다는 것.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인데 암묵적으로 차별을 당연시 여기던 캐나다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추후에 연방정부의 총리가 사과하는 등 인종에 대한 차별을 금지하는 규정이 따로 마련된다. 캐나다 중앙은행에서는 2018년 새로운 10달러 지폐에 들어갈 여성 인물에 대한 공모전을 했는데, 이 흑인 여성이 선정되어 10달러 신권으로 공식 발매되기도 했다. 


↑ 흑인 인권의 상징으로, 매년 관련 시상도 진행되고 있다↑ 특별 공모전을 통해 등장한 새로운 10달러 화폐 이미지.



시크교도

TV에서나 아니면 학교에서나 쉽게 시크교도들을 볼 수 있다. 머리 터번을 쓰고 있어 어디에서나 쉽게 눈에 띄는데, 시크교도들 역시 1970년대 약 수만명이 캐나다로 이주해 오게 된다. 시크교도 성인들은 머리카락이나 수염을 자르지 않으며 그렇게 기른 머리가 드러나지 않게 항상 터번을 쓰고 다닌다. (학교에서 아는 친구한테 혹시 터번의 색깔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물어봤는데 아무 의미 없고 그냥 패션이라고 한다..) 이들에게 터번은 종교적 신앙을 상징하는 도구로서 분신과도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이주해온 시크교도 중 한명인 Baltej Singh Dhillon이 RCMP (왕립기마경찰대)에 합격했을 때 이 터번을 벗고 수염을 자르는 것이 이슈가 되었다. RCMP는 캐나다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이기에 특히 찬반 논쟁이 심했다. 심지어 9만명이 넘는 캐나다인이 RCMP의 복장 규정이 지켜져야만 한다고 서명했을 정도였다.


↑ 시크교도의 공직 복장 허용을 개척한 인물인 Dhillon↑ 이제 많은 이들이 직장에서 터번을 그대로 쓰고 일하게 되었다


하지만 다양성을 존중해 줘야 한다는 의식이 더 강했다. 결국 1990년, 터번을 벗지 않아도 수염을 깍지 않아도 되도록 RCMP의 복장규정을 수정하게 된다. 물론 이렇게 채용이 되고, 터번이 허용되었더라도 일반 시민들에게 거부감 없이 다가가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런 시발점을 통해서 RCMP 뿐만 아니라 많은 직업에서 시크교도들은 터번을 벗지 않아도 되었고, 유니폼 모자 대신에 시크교터번으로 대체할 수 있도록 했다. 아마도 2차세계대전 때 터번을 쓴 시크교도 군인들이 캐나다편에서 같이 싸웠기 때문에 시크교도의 터번에 대해 우호적인 의견도 많았을 것이다. 


현재 NDP당의 대표인 Jagmeet Singh도 시크교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특정 종교를 상징하는 인물이 캐나다의 대표적인 당 중 하나의 대표라는 것도 매우 놀랍니다. 얼마전에 하원의원 보궐선거에서 한국계 캐나다인을 물리치고 하원의원으로까지 당선되어 캐나다 내에서 이제는 보편적으로까지 인식이 되지 않나 싶다. 과연 그가 연방 총리직까지 갈 수 있을지는 두고볼 사항이다. 


↑ MDP 당 대표로 선출된 자밋 싱 위원↑ 2019년 보궐선거에서 승리해서 하원에 입성했다



장애인

캐나다처럼 장애인에 대한 복지가 잘되어 있는 나라도 없을 듯하다. 영국과 프랑스 영향으로 장애인을 거의 일반인과 동일시하게 대우해주고 있으며, 그들이 불편한 부분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 청각 장애의 경우, 미국인들은 수술에 약 $10만을 내야하지만 캐나다에서는 무료로 받을 수 있따. 물론 현재는 한쪽 귀만 해주는데 양쪽 귀 다 해달라는 요구가 있을 정도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좋다. 


↑ 장애인 편의시설들~↑ 총리까지 적극적이다


모든 공공기관에는 장애인들이 쉽게 드나들수 있도록 장애인용 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먼거리를 갈 때는 장애인용 차량을 신청해서 이용할 수도 있다. 우리나라와는 정말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다. 특히 부러운 것은 직업 현장에서 일하고 있는 장애인들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어도 크게 불편함없이 보통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모습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안든다. 


↑ 마트에서도 자주 보는 휠체어 장애인들.. 혼자 쇼핑을 못하게 하면 소송이 일어날 수도 있다↑ 직장에서도 휠체어 장애인 뿐만아니라 여러 지체 장애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런 문화가 존경스럽다


캐나다에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우호적인 것은 1,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크다. 많은 캐나다 가족의 가장들이 이 전쟁에 참여했고, 크고 작은 상처 또는 장애를 갖고 캐나다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캐나다 경제 발전의 일등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는 이들을 캐나다 정부에서는 각별히 대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캐나다 인구의 약 10% 정도가 크거나 작은 어떤 장애를 갖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주차 구역 역시 10%를 장애인 전용으로 설치해 둬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2~4% 인 것을 감안한다면 매우 높은 수치이다. 


캐나다 장애인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테리폭스 Terry Fox일 것 같다. 운동 선수를 꿈꾸었으나 20세에 골육종이라는 암으로 오른쪽 다리를 절단하게 된다. 그는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고 암 연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서 캐나다 동쪽에서 서쪽까지 대륙을 횡단하는 마라톤을 준비한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포기를 권유했지만 그는 마라톤 연습을 하고, 1980년부터 실제로 희망의 마라톤 Marathon of Hope를 시작한다. 


↑ 연습 중인 테리폭스↑ 테리폭스의 희망마라톤


적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시작한 마라톤은 어느 새 캐나다 전역에 알려지게 되었고, 한명당 1달러씩 기부라는 원래 목표를 넘어 5억달러라는 큰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고, 암 연구과 관심에 큰 기여를 하게 된다. 의족을 차고 매일 마라톤을 했던 테리폭스는 하지만 캐나다 중부 지역에 다다랐을 때 골육종이 재발하며 결국 완주하지는 못하고 이듬해 사망하게 되었다. 143일 동안 이어진 마라톤에 그가 달린 총 거리는 5,373km. 하루에 37km를 달린 샘이다. 


↑ 캐나다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영웅이다↑ 테리폭스가 뛴 거리(blue). 미국으로 따지면 휴스턴에서 LA까지 거리다


일반인도 하기 힘든 일을 의족을 차고 해낸 것이다. 캐나다에 가장 젊은 나이에 국민훈장 Order of Canada를 수상했고, 올해의 캐나다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테리 폭스는 현재 죽고 없지만 그의 의지는 지금도 남아, 매년 전세계적으로 테리폭스 마라톤이 진행되고 있고 역시 이 기부금은 암치료와 연구에 쓰이고 있다. 


어쩌면 이러한 위대한 장애인 영웅이 있기에 장애인에 대한 인식도 남다르고, 장애인 역시 어떤 일이든 해낼 수 있다라는 생각을 갖게 된 듯하다.


↑ 테리폭스의 이야기는 TV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열렸던 테리폭스 희망마라톤 달리기 대회



난민

1970년대는 베트남이 남북으로 나눠 전쟁을 하던 때다. 그리고 결국 공산진영의 승리로 끝나면서 엄청나게 많은 자유진영 사람들이 베트남을 탈출하게 된다. 작은 보트를 타고 태평양 바다를 전전하는 보트피플들.. 캐나다는 이들에 대한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그리고 7천여 캐나다인 후원자들이 베트남 난민 30,000여명에게 집을 마련해 주었고 이후 약 총 6만여명의 베트남 난민이 캐나다로 들어오게 된다.


↑ 베트남 전쟁 후 보트피플. 많은 이들이 바다에서 익사했었다↑ 살아남아 캐나다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베트남 출신들의 기념행사


이렇게 도움을 받은 난민들은 자신들이 받은 도움을 이제는 다른 난민들에게 배풀어 주고 있다. 최근들어 시리아 내 전쟁으로 많은 난민이 발생하였는데, 이전에 도움받았던 베트남 난민 출신의 캐나다인들이 이들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제공하는 등 그들이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다시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고 있다.


↑ 시리아 난민들. 이들에게 캐나다라는 나라는 얼마나 고마울까..↑ 베트남 난민출신 가족에게 입양된 시리아 아이. 도움의 선순환~


다양한 나라의 이주민

캐나다는 현재 많은 나라에서 이민을 받고 있다. 캐나다의 인구는 2018년 기준 3,706만명으로 우리나라에 비해 72%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땅덩어리는 비록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곳도 있지만 세계에서 두번째로 크며, 우리나라에 비해 100배 정도 된다. 어느 정도의 경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인구가 있기에 캐나다는 계속해서 이민자를 많이 받고 있다. 


최근 캐나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5명 중 1명은 외국 태생이고, 이 외국 태생 이민지들의 출신지역을 살펴보면  인도, 중국, 필리핀, 영국, 미국, 이탈리아, 홍콩, 파키스탄, 베트남, 이란 순으로 나온다. 특히 최근들어 필리핀, 인도와 중국에서 굉장히 많은 수의 이민자들이 들어오고 있다. 


↑ 캐나다 전체 인구에서 해외 출생자 비율↑ 2011~2016년 이민자 비율(출처: IRCC)



어쩌면 이렇게 많은 이민자들이 안심하고 캐나다로 들어오는 이유도 그들이 가진 문화적 다양성을 그 어느 나라보다 존중받을 수 있기 때문이고, 이는 이전 정착민들의 피와, 땀 그리고 눈물로서 결과라고 보여진다.



일단 캐나다 역사 이야기는 여기까지....

1차 세계 대전 전까지는 우리에게도 다소 낯선 내용이기에 흥미진진했으나 20세기 들어오면서 우리에게도 익숙한 모습이다보니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은게 사실이다. 다음에 틈날 때 좀더 보강하기로 하고...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